• ◆ 2년 5개월 만에 찾아온 광대뼈

    치화형무소 A동, B동, D동은 중형수들을 격리 수감하는, 짐승보다도 못한 취급을 당하는 열악한 곳이었다. 나는 이 3개 동을 이감방에서 저감방으로 이감되어 굴러다니며 개만도 못한 생존을 2년 1개월이나 했다.

    1977년 11월 2일, 나는 격리감방에서 나와 투옥이래 처음으로 격리감방이 아닌 AH동으로 이감되었다. AH동은 2중의 철창사이로 바깥을 항상 내다볼 수 있는, 마치 동물원 같은 구조의 감방이 줄지어 있는 곳이었다. 20여 평쯤 되어 보이는 방에는 50여 명이 수감되어 있어 콩나물 시루같이 비좁았으나, 그래도 여러 수감자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철창사이로 하늘을 내다 볼 수 있어 격리감방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 ▲ 베트남 치화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간수가 몰래 찍어준 사진 ⓒ 자료사진
    ▲ 베트남 치화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간수가 몰래 찍어준 사진 ⓒ 자료사진

    12월 15일에 나는 AH동 2층 2호 감방으로 이감되고, 서병호 영사와 안희완 영사도 모두 이감되어 옴으로써 우리 한국 외교관 세명은 2년반 만에 한곳에 모여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 할 수 있게 되었다. 1978년 3월 15일 오후 두시경, 한국 외교관세 명은 AH동구대 사무실 옆방으로 불려갔다. 그곳에는 안닝노이찡 광대뼈가 부하 두명을 거느리고 책상 저편에 앉아 있었다. 실로 2년 5개월 만에 대하는 광대뼈였다. 광대뼈는 한국 외교관들의 수감생활이 3년이 다 되어가니 건강상태를 보러 왔다고 했다. 속 다르고 겉 다른 말을 자주하는 그들인지라 나는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광대뼈가 나에게 건강상태가 어떤지 물었다. 나는 보다시피 살이 많이 빠지고 허약해졌다고 대답했다. 그는 내가 치화 형무소에 있는 동안, 혹시 고문이나 구타당한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없다고 대답했다. 그 다음에는 나에게 영어신문이나 프랑스잡지, 베트남신문을 읽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영어신문은 읽을 수 있으나 베트남신문은 읽을 줄 모르며,  프랑스어는 기초 실력 밖에 없다고 대답했다.

    그 다음에 광대뼈는 나에게 60세인가 하고 물었다. 살이 엄청 빠지고 주름살이 많이 생겨 그런 수작을 부리는 모양이었다. 내 여권과 모든 신분증을 압수해 갖고 있는 그가 내 나이를 모를리 없었다. 이날 광대뼈와 나와의 대화는 이것으로 끝났다.

    도대체 광대뼈가 왜 2년 5개월 만에 홀연히 내 앞에 나타나서 월남신문이니, 영어신문이니, 프랑스잡지니 등등을 말하고 바람과 같이 사라져 버린 것일까? 그 뒤에 숨어있는 저의가 과연 무엇일까? 나는 풀리지않는 수수께끼를 마음에 지닌채, 답답하고한심한질곡의세월속으로빠져들었다.

     

    ◆ 한국인 자술서 포함된 김일성에 전하는 요망사항

    치화형무소 수감자들이 수감생활 중에 꼭 거쳐야 할 통과절차가 있었다. 그것은 자기의 사상전향(인간개조)을 서약하는 자술서를 써내는 것이다. 자술서 내용에는 37개 항목을 아주 상세히 기록하게 되어있다. 학력과 경력 등을 세밀히 기록하고,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고 사상전향을 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진술한다.

    베트남공산정권에 대한 요망사항에는 총살당해 마땅할 사람을 이렇게 관대하게 살려주는 베트남정부에 감사하며,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가이따우(改造= 인간개조, 즉 사상전향)를 했다. 그리고 훌륭한 호치민 사상을 숭상하며 인민을 위하여 분골쇄신한다는 식으로 장황하게 써내는 것이었다. 이 진술서는 안닝노이찡의 지시에 따라 며칠, 때로는 몇주에 걸쳐 고치고 또 고쳐 안닝노이찡의 구미에 꼭 맞도록 써내야 했다. 수감된 한국인에 대해서는 우선 안닝노이찡이 신문하여 굴복시킨 다음, 이어지는 신문은 북한노동당 3호 청사 정보공작일꾼들이 한다. 여기서 또 굴복하면 드디어 자술서를 받아내는 것이었다.

    한국인이 써내는 자술서에는 김일성 수령께 올리는 요망사항이 있었다. 그들은 특히 이 항목에 세심한 신경을 써서, 절대 충성을 맹세하고 3호청사 일군들의 구미에 알맞게 기록하도록 강요하였다. 나는 죽으면 죽었지 그따위 자술서는 쓰지도 않고, 안닝노이찡의 신문에는 굴복하지도 않기로 결심했다. 따라서 이제까지는 북한노동당 3호청사 통일전선부 정보공작 일꾼들의 신문은 없었다.

    얼마 후, 한국 외교관들의 어두운 앞날을 예고하는 뒤숭숭한 풍문이 며칠 들려왔다. 그러더니 1978년 7월3일, 안닝노이찡의 손발 역할을 하는 치화형무소 교육장교 왠반짝 경찰중위가 AH동에 수감되어 있는 외국인 8명을 형무소 도서실에 집합시키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국제정세는 여러분들 석방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 지금부터 우리 정부가 제시하는 양식에 따라 여러분은 각자 진술서를 작성하게 된다. 잘 쓰면 석방에 유리할 것이다. 진술서는 월남어로 써야 한다. 월남어를 모르는 사람을 위해, 대필해 주는 서기로 저기 있는 찐을 지명한다. 그리고 영어통역으로는 지금 통역을 하는 탄을 지명한다. 진술서를 대필하는 찐이 영어통역탄을 통하여 당신들에게 하나하나 물어보면서 여러분의 개인진술서를 작성할 것이다. 상세하고 정확한 개인진술서를 작성하여야 한다. 진술서 작성은 이 도서실에서 한다.  여러분들이 진술서를 잘 쓰느냐 못 쓰느냐에 따라 여러분 각 개인의 석방이 영향을 받는다.”

    말을 끝낸 짝중위는 야릇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짝중위의 지시에 따라 나를 제외한 외국인들은 모두 자기 감방으로 돌아가고, 영어통역 탄과 대필서기 찐과 나만이 도서실에 남았다.

    진술서 양식은 37개 항목으로 되어 있었다. 생후부터 현재까지 개인의 이력을 수십쪽에 걸쳐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여 자신의 정체를 낱낱이 노출시키고, 북한공산정권이나 베트남공산정권을 찬양해야 했다. 그리고 자신은 가이따우를 했으니 북한 어버이 수령님께서, 그리고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 정부가 관대히 용서해 줄 것을 간곡히 요망한다는 내용을 쓰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37 개 항에 대한 통역원 설명이 끝나자, 대필서기 찐이 진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나는 답변에 앞서 다음 요지의 핵심 발언을 했다.

    “나는 유엔이 주관해서 1961년 제정한 국제법인 비엔나협정의 보호를 받는 국제 외교관이다. 이 협정에는 유엔회원국 뿐 아니라 비회원국 외무장관들도 초청하여 서명을 받았다. 당시 베트남 민주공화국(북월)의 웬뒤찐 외무부장관이 이 협정에 서명한 것은 물론이다. 나는이 협정에 의거하여 국제외교관 면책특권이 있으므로 베트남 국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나는 절대로 베트남 측의 신문에 응할 수 없다. 그러나 행정에 필요한 이름·생년월일·직책·가족사항·기타 이에 준하는 행정사항에 관해서는 내가 죽었을 때, 내 시체나 유골, 혹은 이와 유사한 신병인도 등을 명확히 하기 위해 진술하겠다. 나는 이미 그 행정사항에 대해서는 1975년 5월의 외교관 등록때 베트남 외무부에 제출한 바 있다.”

    대필서기 찐은 짝 중위로부터 나를 다루는데 있어 상세한 지침을 받은듯 못마땅한 표정으로 진술서를 대필해 나가다가, 내가 진술을 거부하는 대목에 가서는 도수 높은 안경을 걸친 거무튀튀한 얼굴을 들고서 대머리를 번쩍이며 나를 나무랐다.

    “모두 자세히 진술해야지 왜 그렇게 빼먹으려고 그러느냐?” 이럴때마다 나는 반격을 가했다.

    “당신은 나의 진술을 대필하기만 하면 됐지 주제넘게 무슨 잔소리요? 당신이 나를 신문하려고 든다면 나는 지금부터 기타의 행정사항 마저도 말하지 않겠소. 이것으로 모든것을 집어치우겠소.”

    진술서 작성은 옥신각신 언쟁을 하다가는 냉각기를 갖기 위해 이따금 10여 분간의 휴식시간을 가지며 느리게 진행되었다. 대필서기 찐은 가끔 나를 치켜 세우는 농담도 했다. 짝 중위로부터 나를 잘 구슬려 좋은 항복문서를 받아내라는 지시를 받은 것이 분명했다. 그는 자술서가 완성되면 짝 중위가 읽어보고, 불성실하고 미심쩍은 점이 있으면 나를 불러 직접 따지게 될 것이라고 은근한 공갈위협을 했다. 그저 웃어넘길 일이 아니어서 나는 한 마디 했다.

    “좋습니다. 깐보(=간수) 한명 뿐 아니라, 1백명, 1천명이 나를 만나 공갈협박을 한들 무서워 할 내가 아닙니다. 깐보들 뿐 아니라 깐보 할아버지들 까지 모두 동원해 보십시오. 내가 눈 하나 까딱할 줄 아십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말싸움으로 시작되어 말싸움으로 끝나버린 대필서기 짠이 작성한 진술서는 쓸모없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 ▲ 베트남 치화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간수가 몰래 찍어준 사진 ⓒ 자료사진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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