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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공에 남아 있는 한국 외교관 8명에 대한 신병을 북한이 공산화된 베트남에 요청한 것은 사이공 함락 직후였다.
- 北 방해공작으로 사이공에 억류된 한국 외교관들
1975년 5월 1일 아침, 사이공 주재 일본대사관 와타나베 참사관은 이 급보를 나에게 전해 주었다. 국제법상 외교관은 절대로 포로로 취급되지 않는다. 비록 교전 당사국 내에 상대국인 적국 외교관이 머물러 있다하더라도 제3국을 통해서 깨끗하게 본국으로 돌려 보내주어야 한다. 이 국제법이 바로 1961년에 유엔주관 하에 제정된 비엔나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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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트남전 ⓒ 연합뉴스
1975년 5월 12일, 베트남공산정부는 미처 철수하지 못하고 사이공에 잔류하고 있는 외교관들의 출국조치에 필요하니 외무부에 등록신고를 해달라고 공고했다. 등록양식에는 본적, 주소, 성명, 생년월일, 국적, 직책, 종교, 정당관계, 베트남입국연월일, 가족사항, 부모성명, 학력, 경력, 상훈관계 등을 기록하고 사진 3매를 함께 제출하게 되어있었다. 이때 한국 외교관 8명도 모두 등록신고를 했다.
6월 8일 베트남 외무부는 한국 외교관 8명의 출국일자는 6월 17일 오전 10시이며, 항공기 탑승 장소는 사이공 탄산눌 공항이라고 발표 공고했다. 그러나 며칠 후 서병호 영사와 안희완 영사의 출국을 금지한다고 발표했으며 그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북한의 방해공작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직감했으나 깊은 내막은 알 수 없었다.
사이공에 잔류하고 있는 한국외교관 및 민간인의 총수는 175명이었다. 이들 중 160여명은 환딘풍가 53번지 와뚜도가 171번지에서 집단생활을 하면서 한국 외교관들이 완전 통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월남 여인들과 결혼한 여자 기소유의 집에 살고 있던가, 또는 처갓집에 함께 살고 있던가, 혹은 환자로서 변두리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고립된 한국이 10여 명에 대한 통제는 한국외교관으로서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베트남 안닝노이찡(安寧內政)이라 불리는 정보공작수사 특별경찰과 북한노동당 3호 청사에서 베트남에 파견된 정보공작 특별 요원들은, 사이공시 변두리에 고립된 10여명의 한국인들에 대한 포섭공작을 극비리에 진행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포섭된 한국인은 통역장교 출신인 예비역 육군소령 김모(某) 였다. 안닝노이찡과 북한노동당 3호 청사 정보공작수사 요원들이 우리 현역 경찰총경인 서병호 영사와 정보취급 담당관인 안희완 영사를 정확하게 빈틈없이 골라낸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서병호 영사와 안희완 영사를 제외한 한국 외교관 여섯 명은 6월 17일 오전 9시경 국제적십자사 사이공 지점장인 스위스인과, 역시 스위스인인 적십자사 직원 두 명의 호위 하에 사이공 탄산눌 공항에 도착했다.
방콕에서 구호물자를 싣고 온 국제적십자 대형 프로펠러 수송기 기장은 자기가 방콕을 떠날 때, 사이공에서 한국 외교관들을 태우고 오라는 지시를 받은바 없어 태울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니 내일 같은 시각에 또 구호물자를 싣고 올 때 태우고 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달라고 했다.
다음날 같은 시각에 역시 국제적십자사 사이공 지점장을 위시한 스위스인 세 명의 호위를 받으며 사이공 탄산눌 공항에 한국 외교관 여섯 명이 도착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베트남 안닝노이찡 경찰간부가 탑승을 가로막고 “행정상 문제로 인해 남쭈띤(남조선) 사람들의 출국을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보류하니 모두들 시내 숙소로 되돌아가시오.”라고 말하였다.
국제적십자 사이공 지점장이 그 이유를 물었으나 안닝노이찡 측은 묵묵부답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구름같이 일기 시작했다. 나는 환딘풍가 53번지에 있는 옛 한국 대사관저로 되돌아가지 않고 뚜도가 146번지에 있는 프랑스인 보네의 집으로 갔다. 나는 보네와 그의 부인 유선환과 함께 한국인 보호에 관한 새로운 대책을 논의하다가 그날 밤은 그 집에서 잤다.
- '비엔나협정' 물거품…안닝노이찡에 소환당하다
6월 19일 아침 일찍 눈을 뜨니 환딘풍가 53번지에서 급보를 알리는 비밀 쪽지가 연락원을 통해 날아왔다. 어젯밤 베트남 안닝노이찡 경찰이 환딘풍가 53번지의 한국인 집단숙소를 급습하여 서병호 영사와 안희완 영사, 김종옥이라는 한국 민간인을 체포하여 어디론지 연행해 갔으며, 남조선 장군 한명이 이곳에 있을 터인데 누구냐며 찾았다는 것이었다. 나를 찾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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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베트남전 참전 용사 묘지를 찾은 한 노병이 옛 전우들의 묘비를 살피며 고인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 연합뉴스
나는 이순흥 회장과 유남성 노인에게 연락을 보내, 서영사와 안영사의 행방을 추적해 보라고 했다. 또 보네에게 스위스 대사관원 한 명과 국제적십자사 직원 한명을 나에게 데리고 와달라고 부탁했다. 약 두 시간 후, 보네는 스위스인 두 명을 데리고 나에게로 왔다. 스위스인들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했다.
“스위스대사관이나 국제적십자사도 프랑스대사관이나 일본대사관과 마찬가지로 한국 외교관이나 민간인들을 도와주는데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베트남공산정부가 국제 법을 준수하지 않고, 대화하기 어려운 상대이기 때문이다. 베트남공산정부가 이 공사를 체포하겠다고 결정만하면 이 공사가 사이공 어느 곳에 숨어있어도 용이하게 체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공사가 이렇게 프랑스 친구 집에 있다는 것은 앞으로 프랑스 친구 신변에 상당한 누를 끼칠 우려가 있으니, 이곳을 속히 떠나 한국인들이 있는 곳으로 갈 것을 권고한다. 이 공사가 체포되거나 북한에 끌려가게 되면 그 사실을 우리들은 스위스 정부와 국제적십자에 보고할 것이다.”
스위스인들은 돌아가고 밤이 되었다. 나는 보네 집을 나와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는 뚜도가 171번지 아파트로 갔다. 이 아프트 6층에는 한국인 여덟 명이 방 5개를 빌려 기거하고 있었다. 나는 동쪽 끝에 있는 김 목사의 방을 양도받아 지내기로 했다.
6월 22일, 안닝노이찡에 갔던 유 노인을 통해 나에게 안닝노이찡으로 출두하라는 소환장이 전달되었다. 소환장에는 1975년 6월 23일 오후 2시 30분에 안닝노이찡으로 출두하라는 시간은 명시되어 있었으나, 소환이유는 적혀 있지 않았다. 나는 보네와 그의 부인 유선환을 불러 상의 끝에, 보네가 스위스대사관과 프랑스대사관 및 국제적십자 사이공 지사에 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자문을 받아오도록 했다. 보네는 다음과 같은 조언을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첫째, 소환에는 응하는 것이 좋다. 아직 소환 이유를 알 수 없고, 너무 나쁘게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소환에 응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이 공사를 체포할 수 있을 것이다. 소환 이유가 불확실한데 미리부터 그들의 감정을 자극할 필요는 없다.
둘째, 소환 이유는 신문, 체포, 한국인 집단에 대한 모종의 경고 등으로 생각할 수 있다.
셋째, 정식 신문을 할 때에는 외교관 면책특권을 내세워 묵비권을 행사하고 경고, 기타의 행정적 질문에는 응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본다.
넷째, 투옥된 두 명의 한국 외교관의 석방을 국제 법에 의거, 요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음날 점심때, 프랑스 모로 서기관이 보네를 통해 메모쪽지를 보내왔다. 1961년 유엔주관 하에 제정한 외교관 면책특권을 규정한 비엔나협정을 내세울 때 특히 46조 B항을 강조하라는 것과, 내 신분을 확인하려 하면 ‘경제공사’였다는 것을 확실히 말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소환장에 명시된 시각에 안닝노이찡으로 갔다. 나를 신문하는 자는 ‘홍’이라는 안닝노이찡 경찰장교였다. 그는 나에게 인적사항을 물었다. 지난 5월 중순 외교관 등록 때 이미 써서 제출한대로 진술했다. 직책은 경제공사 이며, 서열상 부공관장이라고 했다. 그는 사이공에 남아 있는 한국인의 수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그것도 이미 다 등록되어 있는데 감출 필요가 없어 사실대로 말하였다.
이런 식으로 주로 행정사항에 대한 질문과 답변으로 이어지다가, 남조선대사관부 공관장과 경제공사로서 남월정부고관 누구누구를 상대로 어떤 일을 했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행정사항이 아니고 정보사항이어서 묵비권을 행사할까 하다가 한국이 월남에게 경제원조·의료원조를 제공해 준 것은 무방하다고 생각되어 남월 농림부장관·상공부장관·보사부장관 등을 상대로 일했으며, 한국이 남월에 농업사절단·수자원사절단·한월병원 건축 및 의료단 등을 파견해서 월남의 경제개발과 의료지원에 큰 공한을 했고, 월남은 토지자원·수자원·지하자원이 풍부해서 경제개발이 잘되면 경제대국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가끔 내가 매장량 등을 톤 또는 바렐로 이야기하면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가 되느냐고 물었다. 나의 경제이야기를 듣고 좋아하던 그가 “그래서 우리는 남북통일을 한 것이다”면서 자랑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홍은 백지 한 장을 나에게 주면서 “숙소에 돌아가거든 남조선인들을 모아놓고 다음 두 가지를 말해주시오”하고 받아쓰라고 했다.
첫째, 환딘풍가 53번지 남조선인 숙소를 수색하여 은닉된 무기가 발견되면 안닝노이찡으로 가져와야 한다.
둘째, 월남 참전 현지제대 남조선 장병 중 아직까지 신고등록을 하지 않고 숨기고 있는 자는 이달 말까지 필히 등록을 하여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베트남 정부는 해당자를 의법 처단할 것이다.
이상 두 가지를 받아쓴 나는 홍에게 국제 법에 의거, 서영사와 안영사의 석방을 요청하고 그와 헤어져서 뚜도가 171번지 숙소로 돌아왔다. 일단 한 고비는 넘겼으나 앞으로 어떠한 모진시련이 닥쳐올지 모른다. 긴장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다가오는 불안의 그림자 적지에 고립되어 있는 한국인들은 영국 BBC 방송청취, 또는 베트남 신문을 읽으면서 한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고 있었다. 이들 보도에 의하면 한반도에서는 전쟁전야를 방불케 하는 남북의 대결이 이어지고 있었다.
사이공 함락 사흘 후인 1975년 5월 3일, 김일성은 평양에서 100만 명 인민들을 동원집결 시켜 대대적인 군중대회를 열어 “베트남에서 미국이 쫓겨나고 통일 되었듯이 남조선에서 미국이 물러나고 파쇼 정권이 무너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우리도 이제 남조선을 해방시키고 조선반도를 통일하여야 한다”고 외쳤다. 그리고 통일 의욕을 자극하는 강연 사업을 북조선 전역에 걸쳐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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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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