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굳게 닫힌 佛日대사관긴급 구출작전 전문을 보내다

    군중들은 이리저리 흩어지면서 전속력으로 대사관 밖으로 달아났다. 미대사관 밖에 나간 나는 소리쳐서 한국인들을 집결시키고 이들을 인솔하여 프랑스대사관으로 향했다. 긴급 피난처로 프랑스대사관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 주월미국대사관측의 판단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나도 정세판단을 잘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북월측의 남북평화휴전회담 개최 전제조건이 티유 대통령의 하야였다.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티유 대통령은 4월 21일 사임했다. 그러나 그 후 북월측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남월의 붕괴는 가속화 되었으며, 북월공산군의 사이공 진격 시기가 앞당겨졌다. 그래서 북월공산군의 진격이 5월 2~3일경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판단이 4월 26일경에 섰다. 그러나 사이공 함락은 그 날짜보다도 더 빨리 이루어졌다.

    한국민간인 전원과 주월한국대사관 잔류 외교관 전원은 4월 26일 사이공 항구를 떠나는 한국 해군LST에 승선하여 철수를 끝냈어야 옳았다. 공연히 주월미국대사관에 기대어 미군 헬리콥터로 철수하는 길을 택한것이 잘못이었다.

    이보다 앞서 캄보디아 패망시, 주 캄보디아 미국대사와 한국의 김세원 대사가 긴밀한 협조아래 캄보디아 내에 있는 미국인과 한국인을 전원 철수시켰다. 그런뒤 마지막으로 양국대사가 함께 미군 헬리콥터를 타고 방콕으로 철수하여 성공리에 깨끗이 철수작전을 마무리 지은 선례가 있었다. 그러나 장소가 다르고, 사람이 다른곳에서는 다른 결과가 나올수 있다는 개연성을 철수본부장인 내가 가볍게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남을 탓하고 원망하지 않으리라. 허물은 항상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영욕의 득실과 시비의 이해가 다 나 자신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1975년 4월 30일 정오가 좀 지나서, 북월공산군은 1번도로를 따라 동북방에서 사이공 시내로 진격해 들어왔다. 한국인 집단이 치외법권 지역인 프랑스대사관 그랄병원에 들어가서 신변보호를 받고있다는 사실은 불행중 다행이며, 내가 이곳에 남은 보람이 있기도 했다. 우리가 있는 치외법권 지역 앞을 북월 공산군의 전차, 장갑차들의 기계화부대와 보병부대들이 기관총, 소총, 직사포 등을 요란스럽게 쏘아대며 독립궁을 향하여 쳐들어가고 있었다.

    앞으로 내 앞에 나타날 하늘의 시련은 지금 울려대는 저 총성, 포성보다도 더 거셀지도 모른다. 어떠한 고난이 닥쳐오더라도, 어떠한 위기가 몰려오더라도, 앞으로 나는 일편단심, 철석같은 순국(殉國)의 정신으로 내가 확립한 가치관에 따라, 모진풍설을 이겨내며 푸른자태를 굳건히 유지하는 소나무같이 버티리라는 다짐을 더욱 굳게하면서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묵묵히 서있었다.

     

  •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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