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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만 만나.」
박재희가 말했을 때 이동규는 껌을 씹다가 멈췄다.오후 7시 반, 후덥지근한 오후다.
이동규가 가만 있었더니 박재희는 말을 이었다.「앞으로 전화도 하지마. 문자도 날리지 말고, 트위터는 지웠으니까 이젠 끝내.」
그때 이동규가 핸드폰을 반대쪽 귀에 붙이고 묻는다.
「무슨 일야?」
「무슨 일은? 끝낸다는거지. 이유가 꼭 필요해? 그럼 말할게.」화가 난 것처럼 박재희의 목소리가 높고 빨라졌다.
「징징대는 바람에 한번 줬다가 시궁창에 빠진 기분이 들었어. 그래서 지금 나와 씻고 있는 중이야. 두 번 다시 시궁창에 발을 딛고 싶지가 않아서 그런다.」그때 이동규가 입안의 껌을 길바닥에 뱉았다. 이곳은 동네 슈퍼 앞이어서 본 사람은 없다.
「너, 그럼 그 자식 다시 만나?」
겨우 그렇게 묻는 순간 이동규는 자신의 빈약한 언변에 발을 구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그때 수화구에서 박재희의 짧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그러더니 말이 이어졌다.
「그래. 오빠가 용서해줬어. 난 지금처럼 행복한 적이 없어.」
그리고는 통화가 끊겼으므로 이동규는 핸드폰을 귀에서 떼었다.지난번 박재희하고 섹스를 한 후에 시골 할아버지가 오셨다면서 갈 기색을 보였더니 눈치가 이상하긴 했다. 한동안 우두커니 서있던 이동규는 발을 떼었다. 이곳은 이태원의 고급 주택가여서 언제나 조용하다. 차량도 일방통행으로 다니는데다 인도는 마치 산책로 같다.
대문 안으로 들어섰을 때 현관에서 나오는 어머니가 보였다. 화려한 정장 차림이다. 이제 어둑해진 밖에서 보면 영락없이 30대 후반쯤의 나가는 여자 같다. 누가 40대 후반으로 보겠는가?
정원 한복판에서 마주친 어머니가 말했다.
「아줌마한테 고기 구워달라고 해서 밥 먹어라.」
이동규가 그냥 지나쳤더니 이제는 등에다 대고 말을 잇는다.
「난 일산 아줌마한테 가니까 내일 아침에나 돌아온다.」
일산 아줌마는 일산에 사는 어머니 동창을 말한다. 그 여자는 어머니보다 더 날라리여서 언뜻 듣기에는 두 번인가 이혼을 했다는 것이다.집 안으로 들어선 이동규에게 수원 아줌마가 물었다.
「학생 밥 먹을껴?」
「아뇨.」
「배고프면 말혀.」
「예.」응접실을 지나 이층 계단으로 오르던 이동규가 문득 발을 멈추고는 아줌마를 내려다보았다.
「아줌마 아들, 군인 갔다고 했죠?」
「응? 그래.」수원댁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석달 됬는디 곧 휴가 나온다구.」
「근데, 해병대로 지원했다면서요?」
「그렇다니께.」계단으로 다가온 수원댁의 두 눈이 반짝이고 있다.
「내가 뭐하러 그런델 가냐고 했더니 도전 해보겠다는거라.」
머리를 끄덕인 이동규가 몸을 돌렸다.도전은 무슨, 병신같이. 그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려다 말았다.
방 안으로 들어온 이동규가 옷은 벗어던지고는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는 병무청 싸이트에 접속 한 다음에 입영 신청을 했다.세 번이나 징집 연기를 한 터라 한달 후에는 징집이 될 것이다.
신청 확인 버튼을 누른 이동규가 혼자 웃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