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휴지조각으로 변한 '파리평화휴전협정'

    1975년 2월 5일 오전 10시 30분 정각, 북월 공산군 참모총장 반띠엔둥(VAN THIEN DUNG)대장은 하노이 공항에서 AN-24기에 타고 이륙했다.

  • ▲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관련 사진 ⓒ 연합뉴스
    ▲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관련 사진 ⓒ 연합뉴스

    33일 후에 감행될 남침총공세를 남월현지에서 직접 지휘하기 위해서 떠난 것이다. 그가 남월로 떠난 것을 비밀로 하느라, 하노이에 있는 그의 볼가 승용차는 매일 제시간에 북월군 총사령부로 출근을 했다가 제시간에 퇴근을 했다. 그 볼가 승용차에는 반띠엔둥 대장으로 위장한 군인이 타고 있었다.

    또한 반띠엔둥 대장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전속부관은 하노이에 남아서 남의 눈에 뜨이게끔, 가끔 꾀병을 부려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에 가서 법석을 떠는 쇼를 연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오후 늦게, 측근들이 반띠엔둥 대장의 집으로 가서 있지도 않은 그와 함께 배구시합을 하는척 속임수도 썼다.

    또 그가 하노이 북월 공산군 총사령부에 있는 것처럼 우방 공산국의 국군기념일에는 축하메시지를 보내고, 음력 명절에는 선물과 카드를 하노이에 있는 친지들에게 보내는 등빈 틈 없는 기만술을 썼다. 그는 하노이에서 동호이까지는 군용기로 가고, 동호이에서 군용 지프로 벤하이 강에 가서 동력선을 타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다.

    호치민 도로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지내고, 2월 6일에는 남쪽을 향하여 호치민 도로 위를 군용 지프로 달렸다. 호치민 도로는 북월의 빈으로부터 시작하여 월남과 캄보디아 국경을 따라 남으로 장장 965킬로미터를 내려와 사이공 북방의 록닝에 이르는, 흙과 석회석 자갈을 잘 혼합해서 포장한 너비 8미터의 전천후 도로였다.

    1973년 1월 27일 파리 평화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북월 공산군은 막대한 장비와 인원을 동원하여 이호치민 도로를 확장·보수 하였고, 도로변에는 북월의 빈에서 남월의 록닝까지 송유관을 매설하였으며, 전화선도 가설하였다. 남월의 록닝은 사이공으로부터 129킬로미터 북방에 떨어져 있는 곳이며, 파리평화휴전협정에서 공산군 점령지역으로 분류된 마을이었다.

    반띠엔둥 대장은 록닝까지 내려가지 않고 중부월남 고원지대의 전략요충지인 반메뚜트의 서쪽밀림지대에 들어가 짐을 풀었다. 그는 철저한 비밀유지를 위해서 ‘뚜인’이라는 익명을 사용했다. 1973년 3월 10일 오전 2시, 북월 공산군은 중부월남에서 남침총공세를 감행하여 노도와 같이 밀고 내려왔다. 이로써 파리평화휴전협정은 휴지조각으로 변해버렸다.

     

    ◆ 60여만 피난민, 짓밟혀 죽는 사람들

    나는 북월 공산군의 대규모 남침뉴스를 그날 오후에 입수했다. 파리평화휴전협정을 파기하고 북월 공산군이 전면 남침공세를 감행하면, 미국의 공군과 해군이 즉각 월남전에 투입되어 북월 공산군을 강타하고 남월군을 공중지원 하게끔 미국과 남월 간에는 방위공약이 맺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이로부터 불과 51일 후에 북월 공산군이 사이공을 점령하고, 한국인들을 괴롭히며, 나 또한 인생항로에 엄청난 타격을 받으리라고는 미처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 대한민국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주최 베트남 참전 기념행사에서 참전 노병들이 전몰 전우의 명복을 빌며 묵념하고 있다. ⓒ 연합뉴스
    ▲ 대한민국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주최 베트남 참전 기념행사에서 참전 노병들이 전몰 전우의 명복을 빌며 묵념하고 있다. ⓒ 연합뉴스

    대통령 선거일을 5개월 앞두고 남월의 정치인들은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었다.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국민 사기가 떨어지고, 군전투력도 현저히 약화되어 있었다. 또 미국의 방위공약을 믿고 스스로의 대비를 게을리 했다.

    이렇게 이완된 상태에서 북월 공산군 대병력의 기습을 받으니, 남월군 부대들은 고립상태에서 각개격파를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숨 돌릴 여유를 주지 않고 북월 공산군은 분산된 남월군 패잔병들을 추격하여 섬멸시키면서 중부 월남을 삽시간에 석권했다.

    남월 국민의 기대와는 달리, 미국은 남월에 대한 방위공약을 이행하지 않고 관망만하고 있었다. 중부월남의 남월군이 예상외로 쉽게 무너진 것에 고무된 북월 정치국과 당 중앙군사위원회는 3월 27일 합동회의를 개최하여, 우기(雨期)가 시작되는 5월 10일경까지 사이공을 점령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3월 27일과 28일, 남월 제2의 항구도시인 다낭은 북월 공산군에게 포위되어 혼란의 도가니 속에 빠져들었다. 깨끗하기로 소문난 45만의 인구를 가진 다낭에 60여만의 피난민이 몰려들었다. 수십만 명의 인파가 무질서하게 비행장과 부둣가에 몰려들어 서로 먼저 타겠다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바람에, 공중수송철수작전은 일찌감치 중단되었다. 부두에서는 뱃전 밧줄에까지 벌떼처럼 사람들이 달라붙어 배가 움직이자 밧줄을 놓친 사람들이 풍덩풍덩 떨어져 바다 속에 빠져 죽었다. 부둣가에는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다가 짓밟혀 죽는 사람도 많았다.

     

  • ▲ 대한민국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주최 베트남 참전 기념행사에서 참전 노병들이 전몰 전우의 명복을 빌며 묵념하고 있다. ⓒ 연합뉴스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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