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北 38선에 배치된 소련군들

    갑자기 따르르, 따르르 하면서 소련군의 따발총 소리가 코앞에서 울리더니 총탄이 우리들 머리 위로 지나갔다. 장사꾼들은 황급히 되돌아서서 고개 이쪽으로 몸을 피했다. 제일 앞서 가던 장사꾼의 말에 의하면 소련 군인은 두명이라고 했다.

  • ▲ 판문점 이북 북한 선전마을인 기정동마을에서 북한 주민들이 소달구지를 이용해 농사짓기에 여념이 없다. ⓒ 연합뉴스
    ▲ 판문점 이북 북한 선전마을인 기정동마을에서 북한 주민들이 소달구지를 이용해 농사짓기에 여념이 없다. ⓒ 연합뉴스

    고갯길 양쪽에는 사람의 키를 넘는 작은 자생소나무들이 빽빽이 우거져서 짐짝을 짊어진 장사꾼들은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장사꾼들은 돈을 염출해 소련 경비병에게 주자면서 염출할 액수를 의논하고 있었다.

    소련군이 최초로 38선에 배치된 1945년 9월부터 약 반년 동안은 38선을 넘는 조선 사람을 붙들면 손목시계를 뺏고, 여자는 가끔 강간을 한 후 38선 이남으로 보내줬다.

    우리 고향에 살다가 개성으로 이주하러 가던 김기석씨 가족이 소련군에게 붙들렸는데, 부인이 끌려가서 산속에서 소련 경비병으로부터 욕을 당하고 풀려난 일이 있었다. 그러나 1946년 하반기 부터는 그런 일이 별로 없고, 장사꾼들은 돈을 주면서 소련 경비병들을 회유, 남북을 왕래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장사꾼과는 입장이 달랐다. 소련 경비병에게 잡히면 그들은 내 신병을 38보안대로 인도할 것이다. 게다가 돈도 한 푼 없어 장사꾼들 틈에 끼어 염출할 재원도 없었다. 나는 동솔밭 속을 짐승처럼 뚫으면서 38선을 넘으리라 작정하고 홀로 오른쪽 솔밭으로 기어 들어갔다. 방향을 서남쪽으로 잡아 솔밭을 기어나간 후, 밭을 지나 자동차가  다닐수 있는 큰 길로 나갔다. 아직 밝은 빛 보다는 어두운 빛이 좀 더 많은 새벽이었다.

    ◆ "아저씨, 여기가 이남이지요?" / "아니오. 이북이오."

    38선 이남에 왔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리고 기뻤다. 나는 큰 길 옆에 있는 큼직한 초가집으로 갔다. 마당에는 50대의 아저씨가 나와 있었다. 내가 성급하게 “아저씨, 여기는 이남이지요?” 하고 물었다.

    “아니오. 이북이오.” 나는 검은 수염을 길게 기른 아저씨가 말을 잘못하는 거라고 여겼다.

    “원, 아저씨도! 이북이라면 토지개혁을 했을 텐데 여기는 안하지 않았습니까?”
    “왜, 토지개혁을 안해요. 했는데!”
    나는 흠칫했다.

    “옛? 그러면 38보안대 본부가 어디 있습니까?”
    “바로 이집이오.”

    아뿔싸. 나는 보안대 본부를 찾아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도 또 동서남북을 가리지 못하고 서남쪽으로 간다는 것이 서북쪽으로 간 것이다. 나는 질겁하면서 돌아서서 산으로 번개같이 도망쳤다. 그 아저씨가 “저 놈 잡아라!” 하고 소리지르면 큰일이구나 싶었지만 그는 고맙게도 그러지를 않았다.

    솔밭 속에 숨어서 사방을 살피니 어둠은 완전히 걷혔고, 구름이 부지런히 흘러가 푸른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약 1킬로미터 남쪽에는 미군이 지어놓은 콘세트가 있었고, 새벽 일찍 일어난 미군들이 그 마당에서 러닝셔츠차림으로 왔다갔다 하고있었다. 아, 저기가 바로 자유세계, 그리운 38선 이남이다. 좌전방을 바라보니 약 500미터 떨어진 곳에 38보안대원 한 명이 소총을 둘러메고 남쪽을 향하여 경계하고 있었다. 그 보안대원과 미군 콘세트와의 중간쯤이 38선으로 여겨졌다.

    ◆ 오이밭 주인 행세로 38선을 넘다!

    논과 밭은 38선에 구애됨이 없이 펼쳐져 있다. 38선 이북에서 시작된 오이밭이  38선까지 뻗어 있다. 여기는 개성에서 불과 15리 지점이니 개성이라는 소비도시를 끼고 한 몫 보려는 오이밭 이었다. 나는 오이밭을 따라나가기로 하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오이밭 주인 행세를 하면서 38선에 접근하는 것이다.

  • ▲ 판문점에서 남북 군인들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 연합뉴스
    ▲ 판문점에서 남북 군인들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 연합뉴스

    양복 바지를 정강이까지 걷어붙이고 윗도리와 팔소매도 걷어 올렸다. 밭에서 일하는 것처럼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히고 오이순을 닥치는대로 쳐주었다. 그러면서 좌전방에 서 있는 보안대원의 거동을 연방 살폈다. 제일 걱정스러운 것은 진짜 오이밭 주인이 나타나서 오이 도둑놈이라고 소리치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끝이었다. 총에 맞아 죽든지 살든지 남쪽으로 화살같이 달리는 길 뿐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마음 먹었다.

    나는 동네쪽을 슬쩍 곁눈질 하면서 진짜 오이밭 주인이 늦잠 자기만을 바랐다. 오이밭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고, 38보안대 보초는 나를 먼발치로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아무말을 하지 않았다. 가짜 오이밭 주인은 미군들이 늘어놓은 전화선까지 도달했다. 나는 그 전화선을 넘어 공산 감옥행의 꼬리표를 뜯어버리고 그리운 자유 세계의 땅을 밟았다.

    아직까지 지저분하게 오락가락 내리던 장맛비는 어느덧 멈추고, 먹물을 끼얹은 듯한 하늘도 푸르고 맑게 빛났다. 동쪽에서 떠오르는 광명한 아침해가 아카시아 나뭇잎의 이슬을 비쳐주니 신선하고 향기로운 냄새가 폐부를 찔렀다.

    나는 고향에 계시는 아버지와, 고향땅에 묻혀 계시는 어머니 산소를 향하여 울면서 불효를 용서해 달라고 절했다. 그리고 눈을 감고 하늘을 우러러 기원하였다.

    “신이시여! 원컨대 새로운 이 생명을 오직 이 나라, 이 민족의 자유와 번영을 위하여 정의의 투쟁 속에서 죽을 수 있도록 길이길이 보호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나에게 나라 위해 칠난팔고(七難八苦)를 주시고 이를 극복하는 힘을 얻게 해 주시옵소서!”

    주어진 절망의 운명에 결연히 도전하여 이를 물리치고, 새로운 희망의 운명을 개척한 날은 1947년 6월 29일부터 사흘이 지난 7월 2일 아침이었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반세기, 나는 애기봉에 서서 제석산 쪽을 바라 본다. 나에게 은혜를 베푸신 그 고마운 분들이 지금도 제석산에서, 양합에서 살고 계실까. 언제까지나 북을 바라보며 애기봉 정상에 서 있는 나에게, 수행원이 그만 돌아가자고 재촉했다. 나는 애기봉 근무 장병들과 작별의 악수를 나누고 발길을 돌렸다.

  • ▲ 판문점에서 남북 군인들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 연합뉴스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도서 출판 기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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