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일본인 담임 선생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약 4년의 세월이 흘러 나는 보통학교 6학년생이 되었다. 이때 담임은 일본 규슈(九州)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다가 우리 학교로 오신 이제리 사다오라는 일본인 선생님이었다. 이제리 사다오 선생님은 일본인의 식민지 지배 우월감 같은 것은 티끌만치도 가지고 있지 않은 훌륭한 분이었다. 참으로 보기 드문 참다운 스승중의 스승이었다.

    당시 교육은 스파르타식이었으나 그 선생님은 단 한 번도 큰 소리를 내어 학생들을 야단치는 법이 없었다. 더구나 구타 같은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인격적이고 자비스러운 선생님이셨다. 키는 약간 큰 편이었고, 체중도 좀 무거운 편이었다. 얼굴 생김새는 부처님을 많이 닮았고, 검은 눈이 시원스러웠다. 선생님은 한반도에서 오래 머무시는 것이 아니었다. 1년간 우리 학교에 계시다가 그 다음은 다른 학교로 가셔서 또 1년간을 가르쳤다. 그것이 끝나면 원래 봉직하던 규슈의 학교로 되돌아가는, 즉 2년간을 한반도에 파견되어 임시 근무하는 순회 교육 선생님이셨다.

    양복은 규슈 어느 현에서 소학교 선생님 제복으로 규정한 것을 입고 계셨다. 앞단추가 보이지 않는 검은색 양복으로, 일본 해군제독의 제복과 닮은 점이 많았다. 선생님은 영국 작가가 쓰고, 일본에서 일본말로 번역된 로빈슨 크루소 소설책을 담임 맡은 학생들에게 읽어주시며 설명을 했다. 당시의 시골 소년들에겐 그 책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소설 속에 나오는 충복의 이름 ‘후라이디’는 영어로 ‘금요일’을 뜻하는 단어라고 가르쳐 주셔서 학생들은 영어도 한마디 배웠다.

    ◆ 책임을 지는 선장의 희생정신

    하루는 선생님이 세계지도를 펴서 칠판에 걸어 놓고 어느 나라가 제일 큰 나라냐고 물으셨다. 학생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영국입니다”하고 큰소리로 대답했다. 지도에는 캐나다·호주·미얀마·말레이시아·인도·아라비아·이집트 등등 큼직큼직한 땅덩어리가 온통 영국의 영토색인 엷은 분홍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중동 등의 자그마한 여러 나라들도 영국 땅으로 칠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리 사다오 선생님은 영국 본토를 보라고 하시며, 원래의 영국 본토는 한반도 크기와 엇비슷한 면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영국이 이렇게 세계 최강국이 된 것은 누구 덕분이냐고 물으셨다. 학생들 대부분은 영국 왕이 훌륭하고 전쟁을 잘한 덕분일 것이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그것은 선장의 덕분이다”라고 말씀하시고 이유를 설명하셨다. 영국 본토는 석탄이 풍부하지만 기타 지하자원은 보잘것이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영국은 해외에서 원자재를 배로 실어다가 본국에서 여러가지 물건을 만들고, 이 제품들을 다시 배에 싣고 나가서 비싸게 팔아 부(富)를 쌓았다. 값진 물품을 싣고 바다 위를 오가는 영국 배를 보물선이라 부르며, 스페인 해적선들이 자주 습격했다. 영국 배들은 이에 대응하여 무장을 강화했다. 영국 배들이 해전(海戰)에서 적의 포탄을 맞고 침몰하게 될 경우, 선장은 부하 선원들을 구명보트에 태워서 바다 위에 띄워 생명을 보전케 하고 자신은 영국 국기가 휘날리는 마스트에 몸을 묶고 배와 함께 바다 속으로 들어가 희생되었다. 패전의 책임, 침몰의 책임을 지고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책임에 대한 희생의 가치는, 상관에 대한 존경심과 복종심을 길러 주었다. 또한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조선(造船) 기술과 신무기 개발을 촉진시켰으며, 신천지에 대한 탐험심을 자극해 주었다. 이리하여 영국의 오늘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선생님의 말씀은 여기서 끝났다.

    ‘책임을 지는 선장의 희생정신’

    감수성이 강한 소년은 이 선장의 정신을 가슴 속 깊이 소중하게 간직해 두기로 했다. 참으로 먼 옛날의 일이었다. 저 구름 아래에 있는 고향 땅에 서있었던 60여 년 전의 옛 일이었다. 그때 그 선생님은 이미 세상을 뜨셨을 것이고, 소년은 고희를 훨씬 넘긴 늙은 몸으로 임진강 남쪽 산 위에서 물끄러미 고향 하늘을 바라보며 그때를 회상한다.

     

  •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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