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큰 자동차도로를 따라 올라오는 군인들을 아군의 제3중대라 생각했다.

    분명히 자동차도로는 고개 중간 지점에서 제3중대가 차단 배치하고 있었다. 그제 3중대가 적군에게 밀려서 올라오는 것이 틀림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고 보니 아군 제4중대 기관총 사수와 부사수 및 탄약수와 아군 제3중대 소총병의 싸움인것 같았다. 야간에는 아군끼리 서로 모르고 싸우는 일이 간혹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것만 같아 보였다.

    나는 “야, 아군끼리 싸우는 것이 아니냐? 서로 확인해 봐라” 하고 소리쳤다. 이 때 누군가 “수류탄, 수류탄!”하면서 죽어갈 것처럼 외쳤다.

     

  • ▲ 1951년 1월 14일. 부산의 포로수용소에 방금 도착한 중공군 포로의 모습 ⓒ 연합뉴스
    ▲ 1951년 1월 14일. 부산의 포로수용소에 방금 도착한 중공군 포로의 모습 ⓒ 연합뉴스

    마침 그 때 고개를 올라오는 군인 한 명이 내 앞을 지나쳤다. 나는 그의 왼팔을 붙들고 물어보았다. “야, 너 3중대원 이냐? 저기서 싸우는 것은 아군끼리 싸우는 거지? 3중대와 4중대가 싸우는 거지?” 그 군인이 “응, 아군끼리 싸우는거야”하고 대답했다.

    신병인지 대답이 우물쭈물 시원치 않았으나 아군끼리 싸운다는 것 만은 확인된 셈이었다. 그가 나에게 존댓말을 하지 않고 반말 비슷이 하는 것이 좀 못마땅하기는 하였으나, 어두운 밤에 계급장이 보이지 않아서 그러려니 하고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 군인은 방한전투 작업모를 쓰고 긴 군용 외투를 입고 있었다. 당시 아군은 철모를 쓰고 야전점퍼를 입었으므로 그가 아군이 아닌것만은 어린애들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하물며 야전을 달리는 역전의 중대장인 내가 그것을 식별하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상식 이하의 실수가 여기에 일어났으니 내가 중공군의 길을 안내하는 북한군 사병을 아군으로 오인한 것이다.

    당시 나는 내 죽음을 어떻게 가치 있게 맞을 것이냐 하는 일념과, 눈 앞에서 아군끼리 싸우는 것을 시급히 말려야겠다는 마음만 앞섰을 뿐이다. 극도로 긴장된 머리는 그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 “너희들 3중대냐? 조심해라. 아군끼리 싸운다.”

    나는 북한군 사병의 팔을 놓고 기관총이 있는데로 달려갔다. 군인 대열의 선두는 정지된 채 있었으나, 그 뒤에 따라오는 군인의 물결은 뭉게뭉게 쌘 비구름 같이 몰려 올라오고 있었다. 마치 대도시의 길 한복판에서 큰 교통사고가 난 직후에 몰려드는 인파와도 같았다. 그들에게 접근한 나는 코를 맞대고 큰 소리로 물어보았다.

    “너희들 3중대냐? 조심해라. 아군끼리 싸운다.” 그런데 뜻밖에도 상대방의 대답은 한국말이 아니었다. “솰라 솰라, 닐라 닐라......” 아뿔싸! 그들은 중공군 이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무엇을 따질 여유도 없이 순간적으로 “악!” 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른 후 무의식 중에 되돌아 서서 질풍과 같이 고개 마루터기로 달아났다.

    이미 그 곳에 아군은 한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고개 마루터기까지는 약 50미터, 이 길을 단숨에 달려 마루터기까지 약 5미터남겼을 순간, 따르르...... 하는 중공군 기관단총의 총성과 함께 총탄이 빗발같이 날아왔다. “아앗, 이것이 죽는 순간인가’”하고 나는 앞으로 쓰러졌다.

    그런데 참, 영문도 모를 일이 일어났다. 벌집같이 총구멍이 난 송장이 되었어야 할 내 몸은 고개를 넘어 가파르게 직선으로 내려간 오솔길로 굴러 떨어진 후, 중공군에 붙들릴까 보냐 하고 나무 밑에 바짝 엎드려 있었다.

    몸을 움칫움칫 움직여 보았으나 총에 맞아 부러진 뼈는 없는 것 같았다. 곧이어 중공군이 따라왔다. 고개 마루터기를 점령한 중공군은 거기서 가창(假倉) 방면을 향하여 오른쪽으로 구부러진 자동차 도로를 따라 무슨 말인가 떠들썩하게 지껄이면서 줄줄이 걸어가고 있었다.

    중공군이 다 지나가고 동이 트기 시작하자 나는 미럭 고개서 남쪽의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서 몸을 점검해 보았다. 적탄에 맞은 자국은 허리 왼쪽에 매달린 수통피에 하나가 있을 뿐, 몸은 완전하였다. 다만 콧잔등이 땅에 마찰되어 벗겨져 피가 났고, 입과 코에서 피가 흘러나와 여기저기 응결된 핏자국이 있을 뿐 이었다.

    M2 카빈 자동 소총은 자동 스프링이 빠져 달아났으며,  총에 끼웠던 탄창은 없어지고 멜빵이 끊어져 있었다. 그리고 약실과 총구와 노리쇠 부분에 흙이 잔뜩 메워져서 큰 손질 없이는 사격이 불가능했다. 허리에 차고 있던 소련제 떼떼 권총은, 권총집이 새 것이고 가죽 케이스가 권총을 완벽하게 둘러싸고 있어 이상 없이 좋은 상태였다. 적군과 정통으로 마주치면 이 권총으로 대항하기로했다.

     

  • ▲ 1950년 12월 3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엄동설한에 신발을 벗고 바지를 걷어올려 평양의 대동강을 건너 피난을 떠나는 북한 주민들 ⓒ 연합뉴스
    ▲ 1950년 12월 3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엄동설한에 신발을 벗고 바지를 걷어올려 평양의 대동강을 건너 피난을 떠나는 북한 주민들 ⓒ 연합뉴스

    ◆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어야만 한다"

    지난 번 국경지대에서 중공군 중포위망 속에서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이까짓 엷은 포위망을 뚫는다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 처럼 쉬운 일이었다. 돌이켜보니, 지난 1950년 10월 29일부터 시작된 초산군 일대에서 제7연대가 실행한 중공군 중포위망 돌파 작전은 참으로 어렵고 힘든 철수 작전이었다.

    압록강변 신도장(新島場)에 배치되어 있던 우리 제7연대 제1중대장인 나는 이미 10월 26일에 압록강 뱃사공 영감으로부터 중공군 수만명이 10월 17일 부터 사흘동안, 야음을 이용하여 중국쪽에서 압록강 뗏목다리를 건너 만포진으로 들어왔다는 첩보를 입수한 바 있었다. 즉 10월 20일 중공군 다섯명이 말을 타고 지나가는 길에 잠시 신도장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만포진에서 창성으로 연락차 가는 중이다”라고 만포진에 들어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했다. 북한공산군 포로들 중에서도 뱃사공 영감과 같은 말을 하는자가 여러명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아군 정예부대인 제8사단이 희천-강계-만포진쪽으로 북진하고 있었으며, 그 뒤에 아군 제7사단이 뒤따르고 있으므로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가볍게 여겼다. 10월 27일, 제1대대장 김용배 중령의 안내를 받으며 압록강 제1중대 진지에 도착한 제7연대장 임부택 대령은, 현재 온정과 북진일대에서 아군 제2연대와 중공군이 교전중인데 상황이 아군 제2연대에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어 좀 걱정이 된다고 했다.

    그 다음날인 10월 28일, 제7연대장으로부터 김용배 중령에게 제1대대는 10월 29일 새벽에 초산읍을 출발하여 남하, 제7연대 본부와 제2 및 제3대대가 있는 고장(古場)에 도착하라는 작전명령이 하달되었다. 10월 29일 아침부터 제7연대는 고장 남쪽 풍장에서 아군 퇴로를 차단하고 있는 중공군과 교전에 들어갔다.

    29일 낮 동안은 제7연대가 중공군을 돌파하면서 약 30리를 남진했으나 밤이 되면서 전세는 역전 되었으며, 밤 12시에 중공군은 야간 총 반격을 감행했다. 이로부터 약 3시간 30분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우리 제7연대는 북으로, 북으로 밀리면서 어둠 속에 흩어져서 사분오열 상태가 되었다.

    제7연대의 재편성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 중공군은 신속하고 끈질기게 철두철미한 추격을 계속했다. 재편성을 못하고 계속 쫓기고 있는 제7연대의 지휘계통이 드디어 마비되었다. 무전병들도 전사 또는 포로가 됐는지, SCR 300 무전기로 대대장이나 연대장을 호출해도 응답이 없었다. 각 중대는 중대장의 독립 지휘하에 중대별로 뭉쳐서 중공군 포위망을 뚫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이르렀다.

     

  • ▲ 1950년 12월 3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엄동설한에 신발을 벗고 바지를 걷어올려 평양의 대동강을 건너 피난을 떠나는 북한 주민들 ⓒ 연합뉴스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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