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배 대대장은 용감하고 지혜로울 뿐 아니라 어진 군인이었다. 6·25가 일어난지 9일 후, 제7연대 제1대대가 음성전투를 앞두고 충주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허름한 짐 보따리를 등에 짊어진 지친 피난민의 홍수가 충주읍을 지나고 있었다. 이 대열을 바라보며 서있던 김용배 대대장은 “군인된 몸으로 송구스러워 몸둘바를 모르겠군. 연대 S-3에 근무하는 여자 타자수 최양이 조금전 이 앞을 지나갔어. 춘천에서 여기까지 걸어온 모양이야. 그래도 짐보따리를 짊어지고 있더군. 피난민 모두 불쌍해 볼 수가 없어. 다 우리 군인들의 잘못때문이므로 얼굴을 들 수가 없군 그래. 그저 죄송할 따름이야”하고 장탄식을 하면서 군인의 국가에 대한 책임, 국민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있었다.

     

  • ▲ 1953년 미군 10군단 소속 공병부대원으로 참전한 토마스(80) 씨가 휴전 이후 춘천시 신북읍 '샘밭' 주민들의 생활상을 촬영한 사진 ⓒ 연합뉴스
    ▲ 1953년 미군 10군단 소속 공병부대원으로 참전한 토마스(80) 씨가 휴전 이후 춘천시 신북읍 '샘밭' 주민들의 생활상을 촬영한 사진 ⓒ 연합뉴스

    그 분은 북한 공산군 포로에 대해서도 따뜻한 동포애를 베풀어주었다. 부하들에 대해서는 온정을 베풀고 아껴주었으나, 군기를 지키고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는 엄격했다. 나도 그 분으로부터 단단히 꾸중들은 일이 한 번 있었다. 그 때 일을 돌아보면 다음과 같다.

    ◆  제발 중공군이 내일 해 뜰때까지 이곳에 오지 않기를

    1950년 11월 20일은 바로 내 스물다섯번째 생일이었다. 그러나 전투를 하느라 까맣게 잊어버릴 만큼 상황은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런와중에서 우리는 야간행군으로 맹상-북창 방면에서 맹산-순천 가도를 따라 서쪽으로 철수중이었다. 제1대대의 제일 후미에서 행군하던 제1중대가 미럭고개에 도착한 것은 밤 11시 30분경이며, 제1대대는 여기서 방어임무를 수행하게 되어있었다.

    김용배 대대장은 각중대장을 집합시켜 고개 마루터기에서 방어명령을 하달했다. 대대장은 제1중대로 오솔길을 차단하고, 제3중대는 제1중대 왼쪽에서 신작로를 차단 배치하도록 명령했으며, 제2중대는 고개 능선을 따라 예비대로 배치하였다. 나는 5부능선(고개중턱)에 제1중대 병력을 배치하였다.

    고개 중턱은 밭으로 되어 있었으며 경사는 완만하였다. 지도상으로 볼 때, 대대나 중대의 배치는 훌륭했다. 그러나 나는 불안을 느꼈다. 개인 산병호(散兵壕)와 공용화 기호를 파야하는데, 야전삽을 지닌 사병은 고병(古兵)들 뿐이며, 그 숫자도 중대원 총 수의 5분의 1 정도에불과했다. 만일 지금 당장 적이 공격해 온다면 제1중대는 약25도로 경사진 밭가운데 거꾸로 엎드려 산병호 하나 없이 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겨야한다. 이렇게되면 저항다운 저항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대대장의 말에 의하면, 내일 아침에는 훌륭하게 장비된 미 육군 제1기병사단이 이 미럭고개에와서 우리와 교대한다는 것이다. 아군 정찰기의 보고에 의하면 오늘 해질무렵, 중공군선 두부대가 미럭고개에서 약 25킬로미터 전방에 진출해 있었다고 한다. 제발 중공군이 내일 해 뜰때까지 이곳에 오지 않기를 바라며 나는 우선 상병호부터 파라고 지시했다.

     1개 분대에 두개 가량밖에 없는 삽이 쨍그랑 거리며 얼어붙은 땅을 파고 있었다. 60미리 박격포는 밭 가운데 있는 무덤 뒤의 좀 움푹한 곳에 차려 포를 하였다. 밭기슭의 나무가 있는 곳에 기관총을 거치해 놓고, 그 옆에서는 반장 감독하에 기관총 호의 구축작업이 시작되었다. 삽이 없는 신병들은 여기저기 배치되어 전방에 적군이 나타나는지를 감시했다. 엄체(掩體) 하나 없이 앉아있는 신병들은 추위에 웅크리며 떨고 있었다. 추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중공군이 언제 나타날지 몰라 더욱 떨었던 것이다.

    누구나 전쟁에 나와 적군과 처음 싸울때는 벌벌 떠는 법이다. 전쟁 배짱이 생기려면 적어도 열번쯤의 격전을 겪어야 한다. 종합학교 학생들이 새로 소대장으로 부임했으나, 이들 역시 전투경험이 없는 초급 장교들이다. 믿을수가 없어 각 소대배치 사항을 돌아보고 있는데, 오솔길 옆에 오막살이 초가집이 한 채 있었다. 홍인곤 하사가 들어갔다 나오더니, 집주인이 방금 피난을 간듯 불을 때어놓아 방바닥이 뜨끈뜨끈 하다며 언 몸을 잠시 녹여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 초가삼간에 들어가서 방 아랫목에 누우니 등이 따뜻해지면서 몸이 풀리며 기가막히게 좋았다.

    어느틈에 나도 모르게 사르르 잠이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잠이 들자마자 나는 가위에 눌렸다. 사람의 세배쯤 되어 보이는 검은 곰이 나를 타고 앉아 가슴을 조이기 시작했다. 나는 숨이 막히는 듯 괴로워서 곰과 싸우다가 간신히 눈을 떴다. 몸을 일으켜 흔들어 움직여본 후, 다시 누워있다가 또 잠이 들었다. 피곤한 몸은 눕기만하면 곧 깊은 잠에 곯아 떨어진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똑같이 큰 곰이 나타나서 내 가슴을 눌렀다. 나는 곰을 물리치려고 애쓰다가 다시 겨우 깨어나서 홍하사에게 불을 켜게 했다. 그런 뒤 곰이 나타나 가위눌린 이야기를 하고, 참 별일이 다있다고 웃으면서 불을 끄고 다시 누웠다.

    그런데 참으로 괴상했다. 나는 군인으로서 사선(死線)은 벌써 여러번 넘었다. 더구나 권총과 카빈 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므로 도깨비나 귀신따위는 조금도 겁나지 않았다. 하물며 곰이나 호랑이 따위의 동물은 문제도 되지 않았는데, 왜 하필이면 곰이 생시도 아닌 꿈에서 그렇게 나를 괴롭히는지 이해할수가 없었다. 또 잠이 들자, 세번째도 다시 그 곰이 나타나서 가위에 눌렸다. 진땀을 흘리다가 겨우 눈을 뜬 후, 이상한 예감이 들어서 그 집을 나와 3분거리에 있는 제1중대 오피(OP)로 올라갔다. 중대 전체를 통해서 아직 호는 하나도 완성되지 않았다. 단단히 얼어붙은 땅의 표면을 겨우 벗겨내고 있을 뿐이다. 나는 무덤 가장자리에 드러누웠다. 야광시계는 0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 "개죽음이다"라는 생각이 번개같이 머리를 스쳤다

    바로 이때였다. 전방에 내보내 국지경계병이 있는곳, 내 앞 약 500미터 지점에서 딱꽁, 딱꽁 하는 소총소리가 들려왔다. 총소리에 익숙한 내 고막은 즉각 아군을 향하여 쏘는 적군의 소총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10여발의 기관총 소리가 나더니 푸른 예광탄이 내 왼쪽 어깨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뿔싸, 중공군의 공격인 것이다. 나는 어둠속에서 기관총의 응사를 명령했다. 소총소리와 기관총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흙 가죽만 벗겨놓은 깊이 5센티쯤 되는 미완성 산병호에 들어가 엎드려 보았으나, 산병호로서의 가치는 전혀 없었다. 차라리 밭고랑이 나을것 같아서 기어가서 밭고랑에 엎드려 보았지만, 그것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신장 1미터 70센티, 체중 62킬로그램의 몸은 적탄의 피사체로서 완전히 노출될 뿐이었다.

    막 일어서서 오른쪽에 있는 무덤 쪽으로 몸을 옮기려 할 때였다. 뽕뽕뽕 하면서 아주 작은 포발사 소리가 저쪽에서 들려오더니 무엇인가 직사탄도 보다 약간 굽은 포물선을 그으면서 쉬쉬소리를 내면서 날아왔다. 나는 그대로 밭고랑에 번개같이 엎드렸다. 내 뒤에서 폭발하는 포탄의 위력은 아군세열 수류탄 정도의 낮은 위력을 가진 폭발물이었으나, 파편과 흙과 돌들이 사방으로 날아가며 그 중 일부가 내 철모와 전투복 위로 후루루 탁탁 떨어졌다.

    엄폐물이나 차폐물 하나 없이 적의 소총 및 직사탄에 몸을 완전히 노출시키고 있는 것은 사형대에 올라가서 적군에게 몸을 맡기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개죽음이다”하는 생각이 번개같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매에게 쫓기는 참새처럼 신병들은 돌아서서 와르르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후닥닥 일어나서 무덤뒤로 몸을 피하였다. 무덤 뒤에는 박격포반장과 중대 무전병들이 엎드려 있었다. 제3소대장 대리 박상호 상사가 나에게로 달려왔다. 그는 여기서는 저항이 불가능하며, 산마루에 올라가서 능선에 몸을 숨기고 머리와 총만을 적군 방향으로 내놓고 저항해야 한다고 말했다.

    “꽝!” 적의 수류탄이 눈앞에서 터졌다. 신병들은 모두 달아나고 고병들 20여명만 남아있었다. “능선으로후퇴!” 나는 소리쳤다. 헐떡거리며 고개 마루터기에 올라가니 김용배 대대장이 노기를 띠며 나무랐다.

    “야, 이놈아! 이 대위. 너 여기까지 후퇴해오면 어떻게 할 작정이냐? 이대로 나가다간 우리뿐만 아니라 20 리 후방에 숙영하고 있는 미 제1기병사단까지도 전멸이다. 무슨일이 있더라도 날이 샐때까지는 이 고개를 지켜야한다. 여기 1중대 도망쳐온 놈들을 잡아놓았다. 이것들을 끌고 빨리 다시 되돌아가라.”

    김용배 대대장은 나에게 여태 한번도 이놈이라든지, 이자식이라든지 하는 욕을 한적이 없었다. 또 어떠한 급한 상황이라도 눈 하나 깜짝않는 분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저렇게 노기를 띠고 야단을 치시니 그 분의 가슴에는 오늘 밤의 임무수행이 얼마나 중요하며,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이 임무를 완수하려는 결심인것 같았다.

    나는 아무런 변명도 없이 듣고만 있다가 “네, 알겠습니다!”하고 대대장이 붙들어놓은 신병들과,  나와 함께 올라간 고병들을 데리고 밑으로 내려가려 하였다“. 여기가 내 무덤이 되는구나”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의 죽음은 100퍼센트 예견되었다. “어떻게 하면 가장 값 비싸게 죽을 수 있을 것인가?” 내 온 신경은 이 한가지 궁리에 집중되었다.

    “자, 1중대원들은 다시 원진지로 내려간다. 나를 따르라!”

    내가 선두에 서고 그 뒤에 중대전령, 무전병, 통신하사들이 따르고 그 다음에는 각 소대원들이 따르기로 되었다. 선두에 선 내가 고갯마루에서 12,3보쯤 내려갔을까? 고갯마루에서 10여보 내려가면 주막집이 하나 있었다. 이 집은 오고가는 길손들이 땀을 씻으며 막걸리나 혹은 냉수를 청하여 한잔씩 마시고 가는 노상휴게소 이리라. 나는 그 초가집 앞을 지나는 중이었다.

    거기서 4, 5미터만 더 내려가면 자동 차신작로인 큰길과, 오솔길이 갈라지는 분기점이다. 옛 길은 직선을 그으며 골짜기를 따라 밑으로 내려가고, 신작로는 옛길의 왼쪽을 거의 직선코스로 약 4, 50미터 내려다가 급커브를 그리며 좌측으로 구부러진다. 바로 그 급커브 지점에는 제4중대(중화기중대)의 수냉식 기관총 1정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 기관총은 제1중대를 돌파하고 올라오는 오솔길의 적군을 사격하기 위한 종심(縱深)  깊은 후방의 기관총 이었다. 그런데 이 기관총이 돌연 총성을 내면서 불은 뿜기 시작했다. 무슨일일까? 나는 주막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ㄱ자로 급커브를 그린 지점의 상황을 응시하였다. 큰길인 자동차 도로를 따라 올라오던 먹구름 같은 군인 행렬의 집단이 기관 총구의 불과 2, 3미터 앞에서 정강이를 맞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있었다.

    이윽고 뒤에 따라오던 군인집단의 일부가 기관총 사수와 부사수, 탄약수들을 소총으로 쏘고 있었다. 서로 손을 내밀면 붙들 정도의 근거리에서 죽이고 죽는 판이다.

     

     

  • ▲ 1953년 미군 10군단 소속 공병부대원으로 참전한 토마스(80) 씨가 휴전 이후 춘천시 신북읍 '샘밭' 주민들의 생활상을 촬영한 사진 ⓒ 연합뉴스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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