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1년 1월 7일, 김용배 중령은 정든 제7연대 제1대대를 떠나 제7연대 부연대장으로 부임했다. 같은 날 나는 제1중대장에서 제1대대 부대대장으로 승진하면서 제1대대장 대리근무를 하게 됐다.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날 김용배 소령은 제1대대장으로, 그리고 나는 그 예하 제1중대장으로 출전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1월 7일 같은 날, 둘이 함께 부연대장과 부대대장으로 승진하여 자리를 옮긴 것이다.

    1951년 1월 22일, 김용배  부연대장이 정든 옛집이라고 할 수 있는 제1대대를 찾아왔다. 나는 경기도 용인군 백암(白岩) 경찰지서에 있는 대대본부에서 그분을 맞이했다. 제1대대 상황보고를 끝내고 나는 그분과 함께 막걸리를 마셨다.

     

  • 김용배 부연대장은 지난 1950년 10월 10일, 부인이 딸을 출산했다는 소식을 최근에 들었으며, 이름을 ‘송조(松朝)’로 지으라고 연락해 보냈다고 했다. 소나무 같이 지조 있고 아침같이 신선하게 살아가라는 뜻에다가, 조(朝)자가 시월십일(十月十日)을 모아 쓴 글자라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했다.

    취기가 꽤 돌자 그 분은 일제때 지원병으로 나가 일본군에서 근무한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어린 마음에 주위의 권고도 있었고, 또 단지 군인이 되고싶어 지원병이 되었는데 큰 실수였다고 한숨 지었다. 옥에도 티가 있는 법이다.

    다른 하나의 흠은 어렸을 때 부모가 강제로 정해준 대로 밭에서 일 잘하고 집에서 무명이나 명주 잘 짜며 궁둥이가 커서 아기를 잘 낳는, 그리고 순정을 가진 시골처녀와 혼인을 한 것이었다. 어른이 되자 마음에 들지않는 그 조강지처를 버리고, 마음이 끌리는 처녀에게 새장가를 들었다며 다시 한번 크게 한 숨 지었다. 송조는 두번째 부인의 소생이었다.

    김용배 부연대장은 돈과 권력을 잘 못 다루면 성인(聖人)이 죄인(罪人)으로 추락한다고 했다. 그리고 여자문제가 복잡하면 남의 지탄을 받으며 마음이 편치 않다고 했다. 그리고 좀 있다가 군인의 사생관에 관하여 이야기 했다.

    “이대위,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 또는 인생 50년이라고들 하지 않나.
    세월 따라 가다가 언젠가는 아주 가버리는 것이 인생이야. 군인이란 나라와 겨레를 위해 전쟁터에서 희생되는 애국열사를 말하는거지.

    전시에 전쟁터에서 용감한 자는 가고, 후방의 비겁한 약자들은 남는 거야. 그러나 그러한 손익계산을 하다가는 군인의 성스러운 임무를 수행할 수가 없어. 누가 뭐라해도 불평불만 없이 묵묵히 자기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며 목숨을 바쳐야 나라가 잘 될수 있는거지.

    이충무공의 정신이 바로 그것이야. 나라를 지키는 중심 세력이 일선 군인들인데, 이 세력이 희생정신을 잃으면 나라가 끝장이며, 국민들이 여태 쌓아올린 공든 탑이 하루 아침에 모두 다 무너져 버리고 마는거야.

    제1차 세계대전때 유럽 교전국들의 평균 수명이 23.5세였다고 들었어. 그것은 군인의 전시 평균 수명이 인생 50년인 보통 민간인의 약 반액(半額)임을 말해주는 거야. 나나 이대위나, 다 군인의 전시 평균 수명을 넘기고 지금은 덤을 살고 있는거야.

    벽돌같이 네모난 마음가짐으로 청탁(淸濁)을 모두 삼킬 수 있는 넓은 도량과, 돈과 생명을 버리는 무구(無垢)의 정신으로화 굵고 짧은 삶을 값 있게 살다가 싱싱하고 사한 꽃이 떨어지듯이 가버리는 것이 군인의 일생이야.”

    이렇게 말하던 김용배 중령이 그 굵고 짧은 생애를 마감하는 날이 눈 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1951년7월2일. 불과 10일전에 제7연대를 떠나 제7사단 제5연대장으로 부임한 김용배 대령은 강원도 양구 군량리 전투에서 적탄을 맞고 전사했다. 굵고 짧은 반액의 생애를 마감한 것이다.

    이 부음이 제7연대에 전해진 것은 그 다음날인 7월 3일이었다. 비보를 접한 제7연대에서는 김용배 대령이 생전에 가장 아끼며 가깝게 지내던 부하이며, 제2사단 제32연대 대대장으로 확정되어 곧 제7연대를 떠나야 하는 나를 양구로 급파하여 빈소에 머무르다가 장례식에 참석케 했다. 장례 위원장은 제7사단장이었다.

    나는 두 번째로 조사(弔詞)를 읽었다. 남에게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되는 야전의 지휘관, 하지만 나는 조사를 읽다가 목이 메어 여러번 말이 끊기고 눈물을 닦아야만 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유해는 앰뷸런스에 실려 장례식장을 떠났다. 멀리서 일선 장병들의 유혈을 강요하는 포성이 은은히 들려오고 있었다.

    “슬픈 일이로다. 일선의 용감하고 성실한 강자(强者)는 가고, 후방에서 불성실하고 비겁한 약자(弱者)는 남는구나.”

    손익계산 하면서 후방에서 병역을 요령 좋게 기피하는 권모 술수와 사술에 능한 정치적 위선자들과, 군대에 입대하긴 했으나 소위 빽을 써서 일선에 나오는 것을 기피하고 있는 자들에 대하여, 나는 남쪽을 바라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울분을 토해냈다.

     

  •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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