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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이 적 수중에 들어가면 실탄 보급이 끊겨서 국군 제7연대 제1대대는 물론이고, 제7연대 예하부대가 소양강 북방에서 전투할 수가 없게 된다.
국군 제7연대 제1대대장 김용배 소령은 비록 우리의 병력과 화력은 열세이지만, 아주 빠른 기습공격을 적군 측방에서 감행한다면 적군을 짓밟고 큰 타격을 주어 적을 혼란 상태에 빠뜨려 후퇴시킬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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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대용 장군 ⓒ 뉴데일리
그래서 제7연대장 임부택 중령에게 제1대대가 옥산포에 있는 적 부대에 대한 측방공격 명령을 하달해 달라고 건의했다. 임부택 중령은 제16포병대대장 김소령 소령과 협의한 후, 제1대대의 옥산포 기습공격을 허가했다. 이 기습공격의 성공여부는 장병들의 감성과 빠른 기습 속도에 달려 있었다.
1950년 6월26일 오전10시 30분, 국군 제16포병대대의 맹렬한 지원사격을 받으며 국군 제7연대 제1대대 장병들은 산에서 뛰어내려 옥산포를 향하여 노도와 같이 달려갔다. 춘천시에 시선을 집중하면서 공격준비를 하던 북한공산군은 측방에서 날벼락을 치면서 쳐들어오는 국군 제7연대 제1대대에 미처 대항할 태세를 갖출 겨를도 없었다. 그들은 와르르 뿔뿔이 흩어지면서 전투력이 와해되어 자주포5대까지 버리고 허둥지둥 북으로 도주했다.
6월 25일인 어제 점심때 춘천시를 점령하려던 북한공산군의 계획이 실패하자, 북한공산군 제2군단장 김광협 소장은 일선 현지에 나와서 6월 26일 낮에는 꼭 춘천시를 점령해야 한다고 독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국군의 옥산포 대첩으로 오히려 북한공산군이 북으로 패주하는 것을 목격하자 상당히 당황해하면서 군단전방지휘소로 되돌아갔다.
적군이 옥산포에 버리고 간 자주포 5대 중 1대는 적군이 스스로 파괴하고 달아나서 쓸모가 없으나 4대는 멀쩡한 신품이었다. 이 고귀한 노획품을 연대에서 빨리 후방으로 가져가도록 대대에서 상신하여 그 조치를 기다리는 가운데 약 4시간이 흘러갔다. 이윽고 북한공산군의 새로운 부대가 한계울로부터 옥산포를 향하여 공격을 시작했다. 국군 제7연대 제1대대는 이들과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으나, 동쪽에 있는 능선상의 국군 제7연대 제1대대의 잘 구축된 방어진지는 텅텅 비어있었다. 그쪽 원진지로 제1대대가 이동하는 것이 전술상 더 유리하다고 판단한 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옥산포에서 원방어진지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제1대대에 내렸다.
옥산포에서 원방어진지로 이동할 때, 아직도 그곳에 남아있던 4대의 자주포를 우리 중대장들이 깜빡하여 파괴하지 않고 떠나는 실수를 저질러 그것들은 후에 다시 적군 수중에 되돌아갔다.
그 후, 국군 제7연대 제1대대는 계속 적군의 공격을 물리치면서 완벽하게 방어진지를 사수했다. 그러나 후방이 적군에게 차단될 위기를 맞았다. 양구-춘천가도인 46번 도로일대에서 용전분투하여 적군을 36시간이나 저지시키던 국군 제7연대 제2대대가 중과부적으로 원진나루를 건너 소양강 남쪽으로 철수함으로서, 우리 제1대대는 수시간 내에 후방 보급로를 적군에게 차단당하고 포위 고립 될 상황에 놓이게 됐다.
1950년 6월 26일 일몰과 동시에 국군 제7연대 제1대대는 현 방어진지를 포기하고 철수를 개시하여 춘천시내로 집결하라는 연대장 명령이 긴급 하달되었다. 소양강 방어선 편성과 춘천시내에서의 시가전에 대비하기 위한 연대장의 조치였다. 그 후 이틀간 춘천지구 전투는 계속 되었으며, 국군 제7연대는 소양 강변에서, 또는 춘천 시내에서 적군의 발목을 잡고 최선을 다해가며 분전했다.
북한공산군의 남침 계획인 ‘선제타격계획’은 북한공산군 제2군단이 전격적 기동으로 1950년 6월 25일 점심때 춘천시를 점령하고, 우회기동으로 6월 28일 이천-용인-수원 선으로 진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춘천에서 사흘 이상이나 큰 타격을 받으며 허덕거리면서 머무는 바람에 적화통일 목표달성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로인해 국군 패잔장병들은 숨을 돌리고 수원안양지구에서 한강 방어선을 형성하는 부대조직 재편성을 할 수 있었으며, 유엔군이 참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시간적 계기가 마련되었다.
국가흥망의 전략적 관점에서 볼 때 춘천지구 전투는 호국과 직결되는 대첩이었다. 김일성은 춘천지구 전투의 대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제2군단장 김광협 소장을 군단장직에서 해임하여 군단참모장으로 격하시켰으며, 제2사단장 이청송 소장도 사단장직에서 해임시켰다.
춘천대첩은 국군 제7연대 장병들과 제16포병대대 장병들이 우수한 지휘관의 지휘하에 모두 힘을 합하여 나라를 위해 용감무쌍하게 맡은 임무를 완수함으로서 얻어진 결과였다. 그리고 이 춘천대첩의 하이라이트는 6월 26일에 있었던 옥산포대첩이었다.
이 대첩을 현장에서 지휘한 대대장은 김용배 소령이며, 그의 우수한 전투 지휘능력은6·25 초 전부터 이렇게 현저하게 나타났다. 내가 그 분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48년 5월 15일이었다. 육군사관학교 입교와 동시에 원주에 있는 제8연대로 파견되어 육사생 교육대에서 기초교육을 받을 때, 김용배 소위는 구 대장겸 교관이었다. 당시에는 육사생들 이태릉의 본교에서 교육받기 전, 각 연대에 25명씩 파견되어 위탁교육을 3개월간 받게 했다. 각 연대는 그 연대에서 가장 우수한 위관급 장교를 선발해서 육사생 교육을 담당케 했다. 따라서 김용배 소위의 우수성은 이때 이미 입증된 셈이다.
1948년 11월 11일, 내가 육군사관학교를 마치고 소위로 임관되어 부임한곳이 공교롭게도 기초위탁교육을 받았던 제8연대였다. 그래서 그분을 다시 만났다. 1949년에는 그분이 발탁되어 제8연대 작전주임이 되고, 나는 작전보좌관이 되어 함께 일을 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그 분은 또 발탁이 되어 제7연대 제1대대장으로 간 후 나를 전입 요청해서 나는 그의 휘하 제1중대장이 되었다. 그분이 육군 소위일때의 일화가 하나있다. 그분이 주번사관 근무를 하고있던 어느날 밤, 심심해하던 황필주 중위가 주번사관실로 놀러갔다. 주번사관실에 들어서자마자 장난기가 발동한 황중위는 거기에 놓여있던 카빈소총을 재빨리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만약 공비가 이렇게 총을 얼굴에 겨누고 “손들엇!”하면 어떻게 대항하겠느냐면서 방아쇠를 당겼다. 실탄이 장전돼 있는 줄 몰랐던 것이다. “꽝” 하는 총소리와 함께 방아쇠를 당긴 황중위는 비명을 지르면서 쓰려졌다. 총탄은 귀신이 재주를 부리듯 김용배 소위의 눈 옆 살점을 뚝 뜯은 뒤 뼈를 살짝 건드리며 지나갔다. 총에 맞은 주번사관 김용배 소위는 손바닥으로 상처를 꽉 눌러 지혈을 하면서 “어허!”하고 서 있었다. 현장으로 달려간 장병들은 김용배 소위의 대담성과 침착성에 모두 혀를 찼다. 이러한 그 분의 용감성과 침착성, 그리고 뛰어난 지혜와 성실성은 싸움터에서도 늘 돋보였다. 그로 인해 사단장 김종오 준장, 연대장 임부택 대령으로부터 무한한 신임을 받았으며, 빠른 승진을 거듭하여 1950년 7월 9일에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이때 그분의 육군사관학교 동기생들 대부분은 계급이 대위였다. 김용배 대대장은 맑은 물, 흙탕 물을 모두 포용하는 큰 바다와 같은 넓은 도량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훌륭한 대대장 밑에 있는 장병들은, 용장 밑에 약졸이 없다는 말과같이 모두 용감하게 잘 싸웠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겁 많은 제2중대장 오대위만은 그렇지가 못했다. 오대위는 전술적 지식도 있고 평상시에는 중대원 교육 훈련을 잘 시키는 등 모든 일에 열심이었다. 그래서 6·25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제7연대에서 가장 유능한 중대장으로 손꼽혔고, 연대장과 대대장의 두터운 신임까지 받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서 적군과 전투를 하게되자 그는 항상 꽁무니를 빼며 후퇴를 일삼았다. 김용배 중령은 오 대위의 담력을 길러주고 전투에 쓸 수 있는 지휘관으로 키워보려고 애를 썼다. 그런 노력이 꽤 성과를 거두기는 했으나, 타고난 천성을 완전히 바꿔놓지는 못했다.
1950년 8월 30일, 전투가 치열해지자 오 대위는 바위에서 넘어져서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연락병에게 남기고 무단이탈, 후방으로 도망쳐버렸다. 그래도 자신을 따뜻하게 인도해준 김중령을 생각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낀 모양이었다. 다른 못된 장교들처럼 마산이나 부산에 있는 육군병원으로 가서 여러가지 병을 가진 환자로 위장해 입원하거나, 멀쩡한 맹장수술을 받거나하는 따위의 요령을 피우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는 최전방일선에서 약12킬로미터 후방에있는 연대본부에 나타나서 대죄(待罪)하며 근신하였다.
제1대대장교들 대부분은 오대위를 불러 총살이라도 시키는 것이 군기확립상 좋을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김중령은 그를 잘 타이르고 용서하여 일선 후방에 있는 연대본부 작전보좌관으로 일하게 해주었다. 오대위는 상황도도 잘그리고 작전명령도 잘작성하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1950년 9월 16일, 김 중령은 대대병력을 이끌고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인각사 동쪽 능선으로 올라가서 전군과 전투하고 있었다. 산에 오르느라 땀이 비 오듯이 흘러서 잠시 철모를 벗고 이마의 땀을 닦는 순간, 기상천외한 일이 일어났다. 적탄이 김용배 대대장의 머리 윗부분을 때리며 지나갔다. 정면에서 날아온 소총탄이 이마 위 머리 중앙을 7~8센티미터의 긴 자국을 남기고 피부를 벗기면서 유성같이 지나간 것이다. 만약 1센티미터만 아래에 맞았더라도 머리가 두 갈래로 터졌을 것임이 분명했다. 머리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대대장님, 속히 병원으로 가시지요. 피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상처가 꽤큰 것 같습니다.” 옆에 있던 나, 김윤환 대위, 그리고 주위의 여러 사람들이 권했다. 그렇지만 그는“아냐, 괜찮아. 만져보니까 뼈에는 별로 이상이 없는것 같아.” 하며 전혀 개의치 않았다. 위생병으로하여금 약을 듬뿍 바르게 하고 붕대를 두둑이 감게하더니, 철모는 쓰지도 못한채 산 위에서 전투를 계속 지휘하는게 아닌가. 이 소식을 전해들은 부하 장병들은 저토록 훌륭한 대대장을 따르며, 언제든지 나라위해 이 한 목숨 깨끗이 바치겠노라는 다짐을 더욱 굳게했다.
이와는 대조적인 불미스러운 일이 6·25 초기에서 부전선에서 생겨났다. 육군사관학교 제8기생들의 회고록으로 1988년발간된 <노병들의 증언> 가운데 안태갑(安泰甲) 장군(6·25 초기제8연대중대장)이 증언하고, 또 그 증언을 더욱 구체화한 후 일담이 나온다. 거기에 의하면 수도지구방위 임무를 맡고있던 제X연대장 S 중령은 전투가 치열해지자 몸의 급소가 아닌 부분을 쏴서 자해를 했다. 그런 다음 마치 적탄에 부상당한양 속임수를 써서 후방병원으로 후송되어 교묘하게 싸움터를 이탈했다는 것이다.
연대장의 비굴한 행위가 전해지자 연대장병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혼란이 일어나 분산되어 연대의 기능을 상실했다. 연대 총병력은 겨우 1개대대를 편성할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상부 명령에 의해 대대장 정승화 소령은 이 병력을 이끌고 제18연대로 가서 제3대대로 편입됐다. 6·25가 일어나기 전에 공비토벌작전에서 용맹을 떨친 제X연대는 이렇게 허무하게 해산되었다. 문제의 S중령은 제3공화국 시절, 육군대장으로까지 진급하여 군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고 안태갑 장군은 증언하고 있다. 매우 잘못된 인사관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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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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