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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 결과를 보면 대한민국의 사회적 분위기가 가히 혁명적 비등점(沸騰點)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각도에서 보면 지방선거 결과는 소폭발 단계에 와 있음을 보여준다. 아직 대폭발단계에 이르지 못한 것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혁명이론과 혁명 지도자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유행하는 여야 나름의 원인분석은 아전인수이고, 평자(評者)들의 시각은 너무 안이하다.
물론 이명박 “독재”에 대한 반발이라는 분석도 일말의 일리는 있다. 그러나 다수의석을 가지고도 법안 하나, 인사 하나의 처리도 못해 쩔쩔매는 정부와 여당의 모습을 독재라는 말로 설명하는 것은 역시 억지스럽다.
세종시와 4대강 이슈를 여당의 패인으로 돌리는 분석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세종시와 멀리 떨어진 지역(예를 들어 경남 등)과 4대강과 직접 관련이 없는 지역의 반여당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북풍을 이용했다고 하나 그렇게 오랜 시간 검증을 거친 결과에 대해, 다른 것도 아닌 안보문제를 특정정파가 이용했다고 판단한다면 대한민국은 이미 공동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안보위기가 여당에 유리하고 야당에 불리하다는 가정 그 자체야말로 유권자의 국가관에 대한 중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여당이 선거에 패배하고 야당이 승리했다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유권자가 어느 쪽을 조금 더 선택한 것은 “주어진 조건하”에서의 선택일 뿐이다. 이지(二肢)선택이다 보니 둘 중 하나의 선택에서 상대적으로 힘없는 쪽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불만의 좌표에서는 상대적으로 힘있는 자가 멀고 상대적으로 힘없는 자가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 불가피하다. 즉 유권자가 야당을 구세주로 맞이한 것은 아니며 그들의 선택은 절대적 선택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절대적 선택이 아니라고 해서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혁명적 분위기에서 절대적 선택이 불가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앙금으로 계속 남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각도에서 보면 지방선거의 진정한 승자는 없다. 그러나 패자는 있다. 바로 대한민국이다. 분명한 것은 지방선거의 결과는 “불만”이 정치의 펀더멘탈을 압도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사실 문제의 근본은 전혀 다른 곳에 있고 그 크기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크고 광범위하다.
결론적으로 말해 문제의 정체는 정치일반에 대한 누적된 대중적 불만이다. 그 불만에 대해서는 불만을 느끼는 당사자들도 대표적으로 어떤 것을 들어 정확하게 요약할 수는 없다. 워낙 너무나 많고 다양한 종류의 불만이 복합적으로 집합돼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각적 차원에서의 感知는 충분히 가능하다.
불만대중은 대한민국 정치일반에 대해 “만사가 믿을 수 없고 시답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
때문에 통상적인 치유책이 없다. 치유한답시고 개각을 백번해도 소용없다. 또한 여당이 이른바 국책사업을 다소 양보한다고 해서 대중적 불만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혁명적 분이기 라고는 하나 대중이 자유민주주의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대중이 납득할 수 없고 증오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외투 속에 숨은 기득권층의 사기성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대중은 병역기피자 투성이인 정권, 경제권력, 사회권력이 안보를 강조하는 것을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건강한 나라의 요건인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지극히 희박한 나라를 대중은 신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신의 아들」「장군의 아들」이 상당수 빠져 나가고「어둠의 아들들」이 주로 군복무를 해야 하는 나라에서 강고한 공동체의 성립은 있을 수 없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군대에 간 부류는「좌빨」이 다수가 될 수 있다는 비극적 아니러니가 성립될지 모른다. 때문에 이번 선거에서도 여실하게 나타난「노무현의 추억」은 언제라도 재생될 수 있으며 다음 대선, 총선에서도 그럴 것이다.
과거라고 해서 모든 것이 정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의 현실인식은 처음부터 매우 미흡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당시 상당히 흐트러진 정치의 펀더멘탈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강령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은 조목밖에 제시하지 못했다. 이른바 실용주의라는 것이 그 대표적 표현이다. 이명박 정권은 조목 위주의 정치도 문제인데 취임 초부터 「고소영」「강부자」로 낙인찍혔다. 이러한 모습은 대중적 자존심과 기대에 치명적 상처를 주었다.
과거라고 전적으로 아닌 것도 아니었지만 지금의 젊은이들이 볼 때에 이 사회는 계급이 고착된 사회이다. 사회가 그렇게 고착됐다고 보기 때문에 젊은이들의 탈출구는 일확천금의 주인공을 우상화하고 기성윤리를 무시하는「막장드라마」에 열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교육의 기회, 성공의 기회가 「가진 者」위주로 심각하게 제한돼있고 부는 철저하게 대물림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바로 이것이 그들이 분노하는 이유이다. 더구나 IT산업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보편화된 정보화환경은 이들의 불안과 불만이 자기만의 것이 아닌 보편적이라는 점을 순식간에 확인시켜 준다.
사상적인 면에서 젊은이들을 잃어버린 것은 더 오래되었다.
공교육과 각종 사회교육을 통해 주입된 좌파사관은 이들의 가진 감수성의 본체가 된지 오래다. 그들 중에는 실제로 북한정권이 무슨 짓을 해도 민족이라는「아량」속에서 이해하려 하고 대북응징이나 한미동맹은 타기해야할 「반민족적-의존적 사고」라고 판단하는 부류가 엄연히 존재한다. 결국 대한민국은 현재 - 꼭 이명박 정권의 전적인 책임은 아니지만 - 국가정체성과 국민공동체에 대한 믿음이 위기적 상황에 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중적 불만의 본질에서 볼 때에 야당의「기고만장」도 사상누각일 따름이다.
2009년 일본 국민은 자민당 통치를 끝장냈다. 일본 국민은 분명 자민당 통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이 불만인지 일본 국민도 구체적으로 정리하진 못했다. 그저 너무나 오래 계속된 자민당 통치가 지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당에 표를 몰아줬다. 그러나 결과는 별 것 아니었다. 지금 일본에는 다시금 실망감이 팽배하고 있다. 일본뿐만이 아니다. 제도권 정치세력이 대중적 불만의 핵심을 수렴하지 못하는 현상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우리의 야당도 예외가 아니다. 야당은 그저 여당의 무능과 부실을 먹고 사는 것이다. 다음 대선에서도 이러한 분위기에 이지(二肢)선택의 상황이 오면 또다시 야당에게 기회가 올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은 대중적 불만의 본질을 해결하는 것과는 분명히 무관하다. 그저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하나의 방법은 있다. 그러나 그 방법은 현재로서는 무망해 보인다.
사실 대중의 불만은 정치세력의 자산이다. 기성세력과 연고가 없는 신진세력이 대중의 불만을 정확하게 활용할 때에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은 있다. 그래서 기성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는 일이 세계각국의 변혁기에 종종 일어나는 것이다. 대한민국도 시기상으로는 그 변혁기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단 그러한 세력이 결집될 수 있다면 대중적 불만의 사생아라고 할 수 있는 종북적 요소만은 대한민국의 국가목표와 정통성에 부합되도록 철저하게 정화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