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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日本과 朝鮮의 엇갈린 운명
幕府의 ‘안보적 중대 사태’
근대 이전 동북아시아 삼국의 상태는 한마디로 鎖國(쇄국) 속에서의 衰落(쇠락)이었다.
中國, 朝鮮, 日本 모두 이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없었고 근대화한 서구열강에 의한 침탈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19세기 비슷한 위기에 처했던 세 나라의 운명은 한 사건을 기점으로 엇갈리기 시작했다. 淸나라가 아편전쟁 패배 이후 치욕의 역사로 접어들고 朝鮮 또한 그와 함께 몰락의 길을 걸었던 반면 日本은 그 사건을 계기로 극적인 反轉(반전)에 성공했던 것이다.운명을 가른 사건은 日本의 앞바다에서 일어났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黑船(흑선, 구로후네)’ 4척을 이끌고 나타나 日本의 개항을 요구한 사건이다. 당시 日本의 도쿠가와 幕府(막부)는 그에 무기력하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바로 이때부터 그 위세 높던 幕府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이 굴욕적 사건은 幕府에는 불행이었으나 이후 근대 日本의 앞날을 위해서는 오히려 역설적인 행운이었다. 幕府는 무너졌지만 日本이라는 국가의 입장에선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하는 明治維新(명치유신, 메이지 유신)의 출발이 되었기 때문이다.黑船 사건은 당시 도쿠가와 幕府 日本에게도 ‘안보적 차원의 중대 사태’였다. 그러나 日本은 이 안보적 중대 사태를 계기로 잠에서 깨어나 근대화로 향할 수 있었다. 그런데 日本이라는 차원에선 결과적으로는 그랬지만 당장의 幕府 차원에선 아니었다. 전국시대 종식 후의 오랜 평화와 鎖國에 안주해 있던 도쿠가와 幕府는 그 중대 사태에 제대로 맞설 수 없었다. 두 가지에 문제가 있었다. 첫째 尙武精神(상무정신), 둘째 근대적 무기.
幕府의 평화, 尙武精神이 고장나다
日本은 이미 오래전부터 文士가 아닌 武士의 나라였다. 幕府는 칼을 든 武士의 정권이었고, 도쿠가와의 평화도 당연히 칼을 들고 이룩한 평화였다. 그런데 그 평화가 어느새 그들의 칼을 칼집 속에 잠들게 했다.
잠든 칼은 더 이상 싸우는 戰士의 칼일 수 없었고, 군림하고 지배하는 자의 위세를 과시하는 장식의 칼일 뿐이었다. 도쿠가와 幕府는 체제의 안정을 위해 유교적 덕목을 보급하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幕府와 친위 藩(번)들의 상층 사무라이들은 점차 文士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칼을 쓸 기회는 없어지는 반면 文士的 교양은 더욱 강조됐다.
한편 권력의 중심에서 먼 사무라이들은 몰락해 갔다. 평화가 武士의 존재감을 상실시킨 데 더해 평화로운 풍요 속에서 돈을 번 상인계층이 士農工商(사농공상)의 신분제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몰락 사무라이보다는 더 행세를 했다. 정신적 공황에 빠진 사무라이들을 ‘달랠’ 목적이었을까? 도쿠가와 幕府는 茶道(다도) 보급을 적극 장려하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절 상인 출신 센노 리큐(千利休)가 茶道를 정립한 이래 그것은 간소함과 절제라는 일본적 미의식을 갖춘 사무라이다운 취향으로 간주됐다. 하지만 茶 한 잔 마시는 데 그런 격식을 동원하는 게 과연 사무라이다운 것이었을까? 더욱이 茶道는 이미 도요토미 시대부터 상층 사무라이들의 호사가적 취미가 돼 있었다. 도쿠가와 시대라고 다를 까닭이 없었다. 게다가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짐짓 그 흉내를 내면서 미덕은 증발하고 의례화된 격식만 남은 터였다.
양식화된 격식은 실용과 효율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戰場(전장)의 논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日本은 한때 朝鮮을 유린하며 明나라마저 집어 삼키겠다 호기를 부렸었다. 그런데 난숙한 평화가 그 모든 것을 무디게 하고 있었다. 사무라이 정신 즉 日本형 상무정신이 이완됐던 것이다.
鎖國 속의 평화, 함대도 대포도 필요 없었다
한편 도쿠가와 幕府는 대항해 시대 이후 서서히 밀려오는 서양 세력을 ‘데지마(出島) 商館(상관)’이라는 ‘쪽문’ 하나로 달랬다. 데지마는 면적 약 1만 3천 ㎡(약 4천 평) 정도로 여의도 밤섬의 1/10에도 전혀 못 미치는 인공 섬이었다. 서양과의 通商(통상)은 유일하게 그 작은 인공 섬에나마 內港(내항)이 허용된 네덜란드를 통해서만 이루어졌다. 물론 그래도 쇼군을 위시한 幕府 지배층 일부는 그 덕분에나마 서양 사정을 제법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한적이지만 서양의 과학기술 서적 등이 전해져 이른바 蘭學(난학)이 꽃피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幕府의 일부 관계자 外 일반인은 외국과의 접촉이나 출국은 물론 데지마라는 쪽문의 출입마저도 금지돼 있었다. 때문에 日本 사회 전반에 근대화의 충격을 주기에는 근본적 한계가 있었다. 정치체제나 사회문화적 측면에서도 그랬지만 遠洋航海(원양항해)가 가능한 근대적 함선이나 서양식 대포와 같은 군사 기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네덜란드가 그런 것을 日本에 애써 전해줄 이유가 없었던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쇼군이 거기에 흥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흥미뿐이었다. 밖으로 나설 필요 없이 찾아오는 자들만 상대해도 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평화가 지속되고 있었다. 안에서만 오순도순 살아가는 자들에게 굳이 그런 것이 강력히 필요할 이유가 없었다.
충격은 외부에서 와야 했다
물론 도쿠가와 幕府의 지배체제에 일말의 불안요인조차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기근도 닥치고 반란도 없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권력에서 소외된 변방 藩들 사이에 幕府의 대외무역 독점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었다. 권력에서 소외된 변방 藩들이 捲土重來(권토중래)의 꿈을 완전히 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꿈을 실행에 옮길만한 야심을 갖기는 어려웠다.
参勤交代(참근교대)라는 일종의 인질제를 활용한 幕藩體制(막번체제)의 안정성은 상당히 견고했다. 여기저기 금이 가고 때로 더 큰 균열이 보이는 듯도 했지만 적어도 日本 내부에서는 도쿠가와 판 ‘우리 식’ 체제를 본격적으로 흔들 만큼 의미 있는 도전은 찾기 어려웠다. 충격은 결국 외부에서 와야 했다.
먼저 前兆(전조)가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좀 놀라운 소식이었다.
1840~1842년까지 벌어진 영국-淸나라 간 아편전쟁에서 淸나라가 패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러나 幕府의 태도는 완고했다. 아편전쟁 2년 뒤인 1844년, 서양국가들 중 日本과 유일하게 국교를 맺고 있던 네덜란드는 국왕 명의로 도쿠가와 幕府에 친서를 보내 開國(개국)을 권유했다. 그러나 日本의 답은 더욱 문을 굳게 걸어 잠그는 것이었다.들려오는 소식만으로 깨어나기에는 鎖國의 잠이 너무 깊었다. 흔들어 깨워야 했다. 조금 더 가까이서 더 크게 울리는 보다 더 직접적인 충격파가 필요했다. 돌연 찾아든 몇 척의 낯선 군함들이 바로 그 역할을 했다. 바로 黑船이었다.
黑船, 도쿠가와 판 ‘우리 식’ 체제를 강타하다
黑船이 함포 몇 발을 발사했다. 그런데 그 몇 방이 도쿠가와 판 ‘우리 식’ 체제를 결정적으로 강타했다. 1853년 4척의 黑船을 이끌고 와 1년의 기한을 주고 돌아간 페리 제독은 약속대로 1년 뒤인 1854년 이번에는 8척의 黑船을 거느리고 왔다. 10년 前 네덜란드의 친절한 開國 권유는 단호히 거절했던 幕府였지만 함포를 앞세운 미국의 불친절한 요구에는 부랴부랴 굴복했다.
굴욕적 조약에 뒤이어 곧바로 幕府와 反幕府 세력 간 內戰(내전)에 가까운 격돌이 이어졌다. 고통과 혼란의 시기였다. 反幕府 세력은 한동안 尊王攘夷(존왕양이)라는 복고적 깃발만 휘두르며 오직 幕府를 몰아내는 데만 몰두했다. 굴욕적 조약으로 권위를 잃고 도전에 직면한 幕府는 안정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외세의 압박과 內亂의 혼란을 겪으며 두 가지가 이루어졌다.
첫째 그간 평화 속에 잠들어 있던 그들 특유의 상무정신이 깨어났다.
둘째 서양 근대문명의 위력을 깨닫게 됐다.反轉
사무라이 정신이 서양 근대문물의 지식과 만났다.
日本식의 근대적 文武兼全(문무겸전)의 등장이었다. 귀족화돼 가며 ‘매너리즘’에 젖어있던 도쿠가와 말기 풍 겉치레 사무라이가 퇴장했다. 물들지 않은 생동하는 下級武士(하급무사)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애초에는 攘夷論(양이론)으로 시작했지만 결국에는 근대 新지식을 열정적으로 흡수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메이지 유신의 중심에 바로 그들이 있었고, 日本은 그렇게 혼란을 넘어 나름의 근대화를 통해 극적으로 역사적 反轉을 이룩했다.19세기 서구열강의 西勢東漸(서세동점)에서 2차 대전에 이르는 시기, 아시아의 거의 모든 국가는 식민지 내지는 半식민지 상태로 전락했다. 단 하나의 예외가 日本이었다. 260년 이상을 지탱하던 체제가 무너져 내려앉을 만큼의 충격적 굴욕을 근대화로 향하는 反轉의 계기로 만들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日本이 이후 우리를 강탈 유린하고, 대외 침략으로, 군국주의로 치닫다 파국을 맞은 실패와는 별도로, ‘흑선과 메이지 유신’이라는 드라마 자체는 결코 폄하할 수 없다.
朝鮮, 黨爭(당쟁)이 아니라 文弱(문약)이 문제였다
朝鮮 500년 역사는 세계 왕조사에서 드물게 보는 긴 역사다. 그처럼 오래 단일 왕조의 역사를 지탱해온 것은 나름의 장점 덕분이었을 것이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처럼 黨爭(당쟁)을 단지 朝鮮의 분열적 속성이라 단정하는 것은 분명 매도다. 東西古今(동서고금) 어느 나라에서든 정치의 세계에서 권력투쟁이 치열하지 않은 경우는 없다. 朝鮮의 黨爭 또한 모든 정치 세계에 존재하는 불가피한 권력 투쟁이었다고 보는 게 균형 잡힌 평가다.
오히려 朝鮮이 왕조 자체는 바뀌지 않은 채 500년을 이어간 것은 士大夫(사대부)들끼리의 黨爭을 통해 권력투쟁의 긴장이 해소되고 있어 왕정이라는 레짐(regime) 자체는 건드리지 않았던 덕분으로 볼 수도 있다.
문제는 黨爭이 아니라 文弱이었다.
朝鮮은 兩班 士大夫(양반 사대부)의 나라였다. 왕조 국가였지만 이른바 선비라 불리는 文人 士大夫 계층이 지배층의 핵심이었다. 兩班이란 용어 자체는 文班 武班(문반 무반)을 함께 일컫는 것에서 비롯되었지만 실제로 兩班의 대표자는 文人 士大夫들이었다. 좋은 표현으로 文治主義(문치주의)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朝鮮의 경우는 文治라는 말로 변호할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한마디로 군대가 없는 것과 다름없는 나라였다.事大交隣(사대교린), 전쟁도 軍도 다 잊었다
朝鮮에 군대가 없었다고 하면 지나친 얘기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朝鮮시대 대부분의 시기는 사실상 군대가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군대란 경찰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군대는 내적으로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치안유지가 아니라 외부의 敵을 상대로 한 무장집단이다. 군대가 때로 치안유지를 겸할 수는 있지만 치안유지 인력이 외적과의 싸움을 대비한 군대와 같은 존재일 수는 없다.
朝鮮은 군사적 대외진출을 추구하지 않았음은 물론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군사적 防禦充分性(방어충분성)마저도 추구하지 않았다. 물론 모든 시기에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기 朝鮮은 그랬다. 이른바 事大交隣(사대교린) 즉 큰 나라는 섬기고 고만고만한 이웃나라들과는 친하게 잘 지낸다는 외교 위주의 정책이 朝鮮의 일관된 외교안보 정책이었다. 이런 정책을 고수하는 나라였으니 군비강화와 강군육성이라는 것이 주요 과제가 될 까닭이 없었다.
왕실은 강한 軍이 오히려 반역의 불씨가 될 가능성을 우려했고, 文班 士大夫들은 자신들도 직접 병역을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은 꿈에라도 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누군가 병력 확충을 주창하면 愛民思想(애민사상)을 내세우며 반대하던 터였다. 그들은 책과 文房四友(문방사우)는 벗했지만 칼을 그처럼 벗할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文治主義? 아니다. 그냥 文弱이었다.
처음부터 文弱했던 건 아니었건만
朝鮮이 처음부터 그런 나라였던 것은 아니다. 1392년 朝鮮왕조를 개창한 李成桂(이성계)는 오히려 전형적 武人이었다. 물론 그를 추대한 자들은 주자학 士大夫 세력들이었고 李成桂 자신이 사대부들을 대단히 중시했다. 하지만 그래도 군대조차 없는 나라라고 할 만큼의 文弱의 극치였던 훗날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치적 시비곡절에 대한 평가야 어떻든 鄭道傳(정도전)은 李成桂가 威化島回軍(위화도회군)으로 접었던 요동정벌을 다시 추구했다. 태종 李芳遠(이방원)은 鄭道傳의 그런 구상을, 그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는 명분의 하나로 내세웠지만 그렇다고 文弱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文治君主(문치군주)의 전형이자 정점으로 이해되는 세종대왕도 文弱은 결코 아니었다. 北으로 六鎭(육진)이 개척되고 南으로는 對馬島(대마도) 정벌이 있었다. 그 치세 초기 여전히 軍權(군권)을 쥐고 있던 上王 태종 李芳遠이 있었던 덕분이기도 했지만 아직 건국 초의 건강함이 살아 있었음이라 하겠다.
崇文主義(숭문주의)에 중독되다
그러했던 朝鮮이 어느 사이엔가 점점 文治 정도가 아니라 중독성 崇文의 경지에 이르더니 武를 아예 잊어버리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혹은 朝鮮은 원래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갖고 있었는지는 달리 따질 문제겠다. 하지만 왕조 개창으로부터 200년이 흐른 뒤인 1592년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날 무렵에는 이미 重症(중증)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壬辰倭亂 전후 시기의 몰골을 생각해 보자. 朝鮮의 文臣 兩班들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나?
軍役(군역)은 상놈들이나 지는 것이고 兩班 선비들은 칼이래야 아녀자들도 갖고 다니던 銀粧刀(은장도)나 차고 다니는 게 고작이었다. 倭敵이 쳐들어오기 전에는 헛된 말씨름으로 날을 지새우더니, 정작 倭亂이 터졌을 때는 싸움 한번 제대로 못한 채 도망 보따리를 싸고 明나라 援軍(원군)만 애타게 불렀다. 그러더니 그나마 거의 유일하게 倭軍과 제대로 맞서던 수군에 해전 포기를 종용하더니 급기야 李舜臣(이순신) 장군을 白衣從軍(백의종군)시키는 ‘참 대단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만약 그때 白衣從軍의 전장에서 李舜臣이 전사했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벼루로 성을 쌓고 붓을 창 삼으면 나라가 지켜진다 더냐?
그런데 朝鮮은 참혹한 7년 倭亂이 끝난 뒤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對明義理論(대명의리론)이라는 알량한 명분으로 仁祖反正(인조반정)을 일으키더니 실력도 없이 허세를 부리다 丁卯胡亂(정묘호란), 丙子胡亂(병자호란)을 연속해 자초했다. 壬亂이 끝난 지 30년도 되지 않은 때, 다시 10년도 되지 않은 때였다. 그러고는 결국 ‘三田渡(삼전도)의 굴욕’으로 그토록 멸시하던 오랑캐에게 임금이라는 자가 이마에 피가 나도록 땅바닥에 머리를 거듭 찧어대야 했다.
그러나 朝鮮은 그 뒤로도 여전했다. 효종시절 한 때 북벌을 추진하니 어쩌니 했지만 그때뿐이었고 그나마도 국내용 명분의 성격이 강했다. 애초에 朝鮮의 文臣 지배층은 스스로 칼을 들고 나라를 지킬 정신 자세가 없었다. 그들은 兵役(병역)을 구질구질한 勞役(노역) 쯤으로 생각했지 나라를 지키는 신성한 행위라 생각지 않았다. 後金-淸은 朝鮮을 칠 때 이렇게 질타했다.
“너희 나라가 儒臣(유신)들을 길러 그 뜻이 개절하고 몸이 청아하고 말이 준절하다 하나 너희가 벼루로 성을 쌓고 붓으로 창을 삼아 내 군마를 막으려 하느냐.”
- 金薰(김훈)의 <남한산성> 중에서이 고질병은 그러나 壬辰, 丁卯, 丙子 그 연속한 난리를 겪은 후에도 바뀔 줄 몰랐다. 입과 붓으로만 나라를 농단하는 버릇은 여전했고, 외척정치라는 여인네 치마폭 놀음도 매한가지였다.
그러다 드디어 朝鮮 末,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日本이 다시 나라를 넘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朝鮮에는 제대로 된 군대란 찾아볼 길이 없었다. 亂이 일어나면 외국 군대에 의존했고, 왕비가 살해당하면 임금이라는 자는 남의 나라 공관으로 도망을 치는 게 전부였다. 이러고도 나라가 안 망하길 기대할 수 있었을까? 明나라 때는 明나라에 의존하고, 淸에 굴복한 뒤에는 淸에 의존하더니, 열강 각축의 때가 되자 오늘은 이 나라 내일은 저 나라에 기댔다. 이것이 100년 前 庚戌國恥(경술국치)를 향해 갈 때의 朝鮮이라는 나라의 모습이었다.
지금은 과연 얼마나 달라져 있나?
朝鮮의 역사가 남기고 돌아볼 것 단 한 점 없는 부끄러운 역사라는 얘기가 아니다. 마냥 찬란하기만 하거나 마냥 부끄럽기만 한 그런 역사는 없다. 역사에는 언제나 영광과 굴욕이 함께 있기 마련이다. 朝鮮의 역사에도 훌륭한 유산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崇文主義에 중독돼 武와 軍을 잊고 살다 나라가 망가지게 한 것 하나 만큼은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어야 한다. 오직 국방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소위 兩班 士大夫들은 눈곱만큼도 지배층의 자격이 없으며 그들의 나라 朝鮮도 나라라 불릴만한 자격이 없다.
진실은 아프다. 그러나 인정할 것을 인정하지 않고 분칠만 하고 얼버무리다 보면 그 허위의 독성이 골수에 파고든다. 어떤 역사이든 굴욕과 상처가 한 두 점씩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문제는 반복이다. 같은 잘못을 계속 반복하면 동정의 여지가 없는 웃음거리가 된다. 개인도 그렇지만 국가는 더욱 그렇다. 국가와 국가가 부딪히는 무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라는 인간적 미덕을 기대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더욱 엄격하고 냉혹한 법칙이 지배한다.
실수를 다시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얼마든지 역사는 되풀이 될 수도 있다. 東西古今의 여러 기록에는 그런 바보다운 사례들이 얼마든지 널려 있다.
그렇다면 질문 하나 던져 보자. 지금 우리는 과연 얼마나 달라져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