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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國의 부름에 응했던 젊은이들에게
"우리 나라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나라,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을 지키라는 부름에 응했던 우리의 아들 딸들에게 敬意를 표한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복도 벽에는 6.25 참전 16개국 戰死者들의 이름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그 위에는 가로로 이런 글이 쓰여져 있다.
"우리 나라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나라,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을 지키라는 부름에 응했던 우리의 아들 딸들에게 敬意(경의)를 표한다."
(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o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이 글은 워싱턴에 있는 韓國戰(한국전) 기념물에 새겨져 있다.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은 트루먼 대통령이었다.
*反共포로 송환을 거부한 트루먼의 원칙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회고록 제2권 ‘시련과 희망’(1946-1952)을 읽다가 가슴을 치는 감동을 느낀 대목이 있다.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 이 글을 쓴다.
<한국전쟁의 休戰협상 중 가장 골치 아픈 案件(안건)은 포로 송환 문제였다. 우리는 미군 포로를 집으로 데리고 오는 일로 걱정이 많았다. 공산주의자들이 끌고 간 미군 포로들이 非인간적 대우를 받고 있다는 증거와 보도가 많았다. 공산주의자들은 赤十字社의 현지 시찰을 거부하더니 포로 명단을 제출하였는데, 실제 人員(인원)의 6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1952년 1월1일, 우리는 휴전협상에서 ‘돌아가기를 원하는 포로들만 교환해야 한다’는 제안을 하였다. 이로써 가장 심각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 문제에선 절대로 양보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이나 자유에 대하여 전혀 고려하지 않는 제도이고, 따라서 정신이 바로 박힌 정부라면 자유롭게 살겠다는 포로를 억지로 이런 제도下로 돌려보낼 순 없는 것이다. 우리 편에 서서 자유를 위하여 싸운 한국인들을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나는 전쟁 포로들을 그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공산당 지배 체체로 돌려보내려는 해결책을 거부하였다. 1952년 5월7일 내가 한 연설에서 내 마음 속에 있던 생각을 정확하게 담은 구절이 하나 있었다.
“인간을, 학살되거나 노예가 되도록 넘겨주는 代價(대가)로 휴전을 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We will not buy an armistice by turning over human beings for slaughter or slavery.)
나는 이 문제는 거래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 연설에서 “포로들의 자유의사를 무시한 강제송환은 韓國戰(한국전)에 참전한 우리의 행동을 뒷받침하는 도덕성의 근본과 인도주의 원칙과 모순되는 것이다. 우리 손으로 포로들을 강제로 돌려보내면 (그들에게)비참한 流血(유혈)사태를 불러 미국과 유엔에 있어서 영원한 불명예가 될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포로들을 강제로 송환받기를 요구함으로써 세계 앞에 그들이 어떤 체제를 운영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라고 강조하였다.
미국의 젊은이들을, ‘알지도,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한국전에 보낸 트루먼 대통령은 임기 말에 가면 승리도 패배도 아닌 상태에서 休戰(휴전)협상이 지루하게 계속되는 바람에 지지율이 20%대로 떨어진다. 歷代(역대) 최저 지지율이었다. 보통 대통령이라면 ‘모든 포로의 상호 교환’을 통하여 自國民(자국민) 포로를 서둘러 데리고 오려 하였겠지만 트루먼은 反共(반공)포로들을 돌려보낼 수 없다는 원칙을 固守(고수)하였다. 反共포로들의 다수는 북한군 포로였다. 즉, 외국인의 人權(인권)을 위하여(사실은 인도적 원칙을 위하여) 自國民(즉 포로)을 희생시킨 셈이다.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선 反共 포로와 공산 포로 사이에서 殺戮(살륙)이 끊이지 않았고, 미군 포로 수용소 소장을 공산 포로가 납치해가는 사건도 일어났다. 그래도 트루먼은 원칙을 굽히지 않았다.
포로 송환 문제를 둘러싸고 休戰(휴전)협상이 難航(난항)하는 가운데 高地戰(고지전)이 2년간 계속되어 쌍방 포로들보다 더 많은 수십 만 명이 戰死하였다. 스탈린이 죽자 공산측은 미국의 ‘자유의사 확인 후 송환’ 원칙에 동의하였다. 1953년 6월18일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이 관할하던 북한군 출신 反共포로 약3만 명을 강제 석방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는 서둘러 휴전하려는 미국을 압박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중공군과 북한군은 항의하는 척하다가 그냥 넘어갔다. 북한정권이 한국군 포로 수만 명을 돌려보내지 않고 不法(불법) 억류한 것은 이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보복이란 說도 있다.
트루먼 대통령은 6.25 전쟁중 네 번 위대한 인도적 결단을 하여 한국과 한국인을 살렸다. 南侵(남침) 보고를 받자마자 “그 개자식들을 막아야 한다”면서 참전을 결단하였고, 중공군이 38선 以南(이남)까지 밀려내려 오고 맥아더와 영국이 유엔군의 한반도 철수를 건의하였을 때도 “미국은 困境(곤경)에 처한 친구를 버리는 나라가 아니다”고 선언하였다. 미군은 흥남에서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후퇴하면서도 한국인 10만 명을 구출하여 데리고 왔다. 그리고 반공포로를 보호하기 위한 결단!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는 미군이 한 士兵(사병)을 구출하기 위하여 특공대를 보내 수십 명이 희생되는 줄거리이다. 미국이 구하려고 하였던 것은 라이언 일병 한 사람의 생명뿐 아니라 高貴(고귀)한 인도주의 원칙이었다. 韓國戰에서도 트루먼 대통령은 그 원칙을 지켜내기 위하여 수많은 美軍들을 희생시켰다. 그 덕분에 한국인들은 지금 번영과 자유를 누리면서 잘 살고 있다. 그 한국인들이 트루먼을 잊었다. 트루먼이란 이름이 붙은 거리, 공원, 기념물이 없다. 임진각 공원의 한 귀퉁이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자그마한 트루먼 동상이 있을 뿐이다.
트루먼 한 사람의 결단에 의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는 한국인은 김일성 南侵 전쟁 60주년을 맞아 ‘트루먼 대통령 기억하기 운동’이라도 벌여야겠다. 고마워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잘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밴 플리트 8군 사령관 아들의 戰死
6·25 남침 전쟁 때 유엔군의 主力이던 미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은 그의 아들이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한 경우이다. 그의 아들 지미는 그리스에서 근무하다가 本國에 돌아와 있었다. 그는 해외 근무를 한 직후라 다시 海外 근무를 할 자격이 없었지만 굳이 자원을 하여 한국 전선을 택했다. 그는 한국 전출 명령을 받자 어머니에게 이런 요지의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어머니께: 이 편지는 군인의 아내에게 바치는 편지입니다.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만… 저는 자원해서 전투비행훈련을 받았습니다. 저는 전투 중에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저는 조종사이기 때문에 機首(기수)엔 폭격수, 옆에는 항법사, 후미에는 기관총 射手(사수)와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야간비행을 할 것입니다. 아버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싸우고 있으며 드디어 저의 微力(미력)한 힘이나마 보탤 시기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저를 위하여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에 미국이 위급한 상황에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소집된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아직 가정을 이뤄본 적도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의 의무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들 짐 올림>
지미는 한국으로 부임하자 동료 승무원들을 데리고 미8군 사령부를 찾아가 아버지를 만났다. 1952년 3월19일 밴 플리트가 만 60세 생일을 맞은 날이었다. 며칠 뒤 父子는 서울 북쪽의 갯벌로 기러기 사냥을 나갔다. 4월2일 밴 플리트 장군은 아들과 통화를 했는데 아들 짐이 그즈음 북한 지역으로 출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1952년 4월4일 오전 10시30분, 밴 플리트는 미 제5공군 사령관 제임스 에베레스트 장군으로부터 아들 지미가 야간 출격을 한 뒤 귀환하지 않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지미와 두 승무원은 압록강 남쪽에 위치한 순천 지역을 정찰 폭격하기 위하여 출격했었다. 지미로서는 네 번째 출격이자 최초의 단독 비행이었다. 새벽 1시5분에 이륙한 그는 새벽 3시 김포 비행단의 레이더와 접촉했다. 지미는 主표적이 구름에 가려져 있다면서 예비 표적을 요구했다. 예비 표적을 향하여 날아가던 지미의 폭격기는 레이더에서 사라진 뒤 소식이 끊긴 것이었다. 그에 대한 구출작전이 진행되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아들에 대한 공군의 수색작업이 도를 넘지 않도록 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 구출 작전을 중지하라”고 명령한 것도 그였다. 그 후로도 그는 가끔 아들이 실종된 지역의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그해 부활절 밴 플리트는 한국 戰線에서 실종된 군인 가족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저는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벗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내놓은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습니다>
밴 플리트 장군의 아들은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그 벗은 미국 국민이기도 할 것이고, 남침을 당한 한국인이기도 하다. 더구나 밴 플리트의 아들은 자원해서 한국에 왔다. 동포가 아닌 他國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던진 이 젊은이에게 살아 있는 한국인들은 모두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美 CIA 부장의 외아들, 한국에 참전, 머리에 총 맞아
알렌 덜레스와 존 포스터 덜레스 형제는 장로교 목사를 아버지로 하여 태어났다. 兄인 알렌 덜레스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스위스에 머물면서 정보工作을 지휘하였다. 그는 1947년 미국 CIA가 창설될 때 많은 도움을 주었고 1953년부터 9년간 CIA 부장직을 맡았다. 그의 동생 덜레스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아래서 國務(국무)장관으로 일하였다.
알렌 덜레스는 獨子를 가졌는데 이름이 알렌 메시 덜레스 2세였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역사와 정치를 공부하면서 公職者(공직자)의 길을 준비하고 있던 중 6·25 남침전쟁이 터지자 해병대에 지원하여 장교로서 한국戰線에 배치되었다. 그는 최전방에서 싸웠다. 아버지는 아들을 후방에서 근무하도록 해달라는 따위의 영향력을 전혀 행사하지 않았다. 그는 1952년 머리에 총상을 맞고 영구적인 정신장애자가 되었다. 프린스턴 대학은 1997년에 ‘알렌 메시 덜레스 51년 賞’을 제정하여 국가를 위하여 봉사한 학생들에게 주고 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 존 셀던 도드 아이젠하워도 장교로 참전하였다. 아이젠하워가 195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을 때 아들은 한국戰線의 미군 전투 대대에 배속된 소령이었다. 대통령 당선자는 한국戰線을 방문한 자리에서 지휘관에게 “내 아들이 포로가 되지 않도록 부탁한다”고 했다. 대통령의 아들이 敵軍(적군)의 포로가 되어 이용당하는 사태만은 막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이젠하워 소령은 사단본부 근무로 옮겼다.
*한국戰線에서 죽은 하버드 졸업생 17명
설립한 지 374년째인 미국 하버드 대학의 캠퍼스에서 가장 두드러진 건물 두 곳은 졸업생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하버드 대학교엔 90개가 넘는 도서관이 있고 총 藏書量(장서량)은 1560만 권이다. 중앙도서관은 ‘와이드너 라이브러리’로 불린다. 300만 권을 소장하고 있는데 書架(서가)의 길이가 약 90km나 된다. 1912년 북대서양에서 氷山(빙산)과 부딪쳐 침몰한 호화여객선 타이타닉號에 타고 있던 하버드 1907년 졸업생 해리 엘킨스 와이드너는 책 수집가였다.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고 350만 달러를 기부하여 1915년에 준공한 것이 와이드너 도서관 건물이다.
와이드너 도서관 맞은편엔 추모교회(The Memorial Church)가 있다. 1932년에 지어진 건물인데, 교회 겸 戰死者(전사자) 추모시설이다.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 월남전에 참전하여 戰死한 하버드 졸업생들의 이름이 벽에 새겨져 있다. 동판에 새겨진, 한국에서 戰死한 하버드 졸업생은 17명이고,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TO THE ENDURING MEMORY OF THE HARVARD MEN WHO GAVE THEIR LIVES IN THE KOREAN WAR
College
Peter Emilio Arioli, Jr. - 1938(졸업연도)
Franklin Jaynes Tyler - 1941
Edwin Gustaf Eklund, Jr. - 1942
Dirck DeRyee Westervelt - 1942
Robert Martin Moore, Jr. - 1943
Bigelow Watts, Jr. - 1945
Chester Harrison Crampton, Jr. - 1946
John Goodrow Sheehan - 1948
Douglas Hamilton Thomas Bradlee - 1950
Kenneth Joseph Murphy - 195×
Franklin Perkins Dunbaugh - 1951
Thomas Amory Hubbard - 1951
George Cabot Lee, Jr. - 1951
Donald Adams Little - 1951
Sherrod Emerson Skinner, Jr. - 1951
Wilbur Lee Van Bremen - 1951
David Hodgman Flight - 19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