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고백과 대화이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상징하는 정치적 코드는 ‘약속’, ‘신뢰’와 ‘원칙’이다. 비단 이번 세종시 건을 떠나서도, 박대표는 늘 국민과의 약속과 신뢰 등등을 강조해왔다. 중도우파 진영에서도 바로 박대표의 이러한 점을 늘 높이 평가해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4년 12월, 국가보안법, 신문법, 사학법, 과거사법 등으로 박대표의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충동할 당시 ‘수첩공주’라는 악명을 부여받은 전력이다. 당시 열린우리당은 “박근혜 대표는 수첩에 적은 내용 이외에는 일체의 협의를 하지 않는다”며 공격했다. 물론 국가보안법을 제외하고는 모두 열린우리당의 주장이 반영된 법안이 통과되었지만, 박대표는 이 당시 원칙에 어긋나는 일은 일체 하지 않는다는 강고한 이미지를 얻게 된다. 특히 사학법의 경우 박대표가 주도하여 중도우파 진영에서 촛불집회를 연속 개최하기도 했다.

    박근혜 전 대표의 수첩공주 이미지

    박대표의 또 다른 이미지는 탄핵 역풍으로 한나라당이 전멸의 위기에 처했을 당시 천막당사로 옮기면서 결국 당의 존립을 지켜낸 잔다르크형 인간이다. 그 당시 당을 살리기 위해 수많은 유권자들과 악수를 하다 결국 손에 부상을 입은 사진은, 한나라당에서 사진 전시회를 할 정도로, 중도우파의 상징이 되었다. 더구나 2002년 대선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불법자금에 대해 국민 앞에 사과하고, 이를 반납하겠다고 선언한 뒤, 실제로 당사를 팔아 실천한 점도 국민들에게 뇌리 깊이 박혀있다. 동 시기에 총선을 치른 열린우리당과 당시 당대표였던 정동영 전 당의장도 같은 공약을 했지만, 이를 지키지 않았다.

    박대표가 2007년 대선을 위한 한나라당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 패했을 때, 중도우파 진영은 박대표의 경선 승복 여부를 가장 크게 우려했다. 그러나 박대표는 최소한의 선거운동까지 해주며 형식적으로는 경선 결과에 승복, 결국 정권교체를 이루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박대표의 정치적 행보는 세종시 원안 사수론을 주장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가 된다. 이러한 박대표의 행보는 대중 여론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윈지코리아컨설팅이 지난 13일 제6차 정기현안 여론조사 결과 박근혜 전 대표가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에 대해 반대하는 것에 대해 ‘본인의 소신이라면 반대할 수도 있다’는 응답이 59.7%로 ‘여당의 일원으로 계속 반대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응답 29.2%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높았다. 박대표가 반대하는 이유에 대해 ‘여야 간의 합의 사항이고,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가 45.1%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그 뒤를 이어 ‘차기대권을 염두에 두고 충청권을 의식해서’라는 응답이 23.6%였다. 이명박 정부가 발표한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지지율이 원안 고수보다 상대적으로 높게 나오지만, 박대표에 대한 국민적 평가는 여전히 긍정적인 것이다.

    박대표는 세종시 수정안 발표와 관련하여 “결과적으로 국민과의 약속을 어기고 신뢰만 잃게 된 것”이라며 강경한 입장을 바꾸지 않고 있다. 이명박 정부와 이른바 친이계에서는 박대표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뾰족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일단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분명히 충청권에 세종시 원안 추진을 약속했고, 대통령이 직접 이를 사과하고 번복한 원죄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구도는 세종시 수정안과 신안의 효율성보다는 국민에 대한 원칙과 신뢰 부분이 더 설득력있는 명분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박대표의 경우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수도이전안에 대해 2003년 12월에 찬성했고, 2004년 4월 총선에서 이를 선거 공약으로 국민 앞에 약속한 바 있다. 그리고 총선 이후 중도우파진영의 반발을 수용해 이를 뒤집었다. 박대표의 입장 번복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은 이유는 2004년 10월 21일, 헌법재판소에서 수도이전안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헌법재판소 판결문을 조목조목 분석해보면, 법안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수도이전과 같은 사안은 국민투표 이후 개헌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지적했을 뿐이다.

    이미 수도이전안은 박대표를 비롯 당시 한나라당이 찬성하여 국회 재적의원의 3분의 2를 넘는 찬성표를 획득하여 통과되었다. 수도이전안 추진 세력인 열린우리당은 그 이후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하였다. 여당과 야당 모두 수도이전안에 동의하였기 때문에, 국회 의석수 3분의 2 확보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국민투표 역시 여야 모두 찬성 여론을 만들어나간다면 99% 가결시킬 수 있었다. 박대표의 경우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 이전에 이미 자신이 찬성표를 던진 총선 공약을 뒤집었고, 지금의 세종시 원안의 모태가 되는 한나라당 당론을 확정했다. 즉 헌법재판소가 위헌판결을 내리지 않았더라도, 박대표는 수도이전안 공약을 번복하여,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의 언급처럼 부지 선정 등등에서 발목을 잡아 막았을 것이다.

    2003년과 2004년 박근혜 전 대표의 행보는 이명박 대통령과 똑같아

    2003년과 2004년까지의 박대표의 정치적 행보를 보면, 지금의 이명박 대통령의 행보와 차이가 없다. 선거를 앞두고 충청권 여론을 의식하여 실천할 의지가 없는 공약으로 선거에 이용하였고, 선거 이후 이를 뒤집었다. 실제로 열린우리당은 이러한 박대표의 행보에 대해 ‘국민 사기극’이라며 맹비난했다. 지금의 박대표가 이명박 대통령을 공격하는 논리와 한치의 차이도 없다.

    박대표가 이러한 자신의 과거 행보를 모를 리 없다. 그런데 왜 똑같은 상황의 이명박 대통령을 비난하고 나설까? 박대표의 행보를 최대한 선의로 이해할 수도 있다. 박대표는 세종시 원안을 만들 당시 “국민 앞에 사과하고 새로운 당론을 만들면 절대 번복하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즉, 자기 스스로 부끄럽다는 점을 인정하고, 이에 대해 공식 사과했으며, 그 이후의 안에 대해서는 절대 번복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한 것이다.

    이러한 박대표의 태도는 인간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점에 대해서라면 이명박 대통령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 역시 대통령은 서울에 있고, 총리는 세종시에 있는 수도분할안에 대해 절대 동의할 수 없었지만, 선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약속했다는 점을 국민과의 토론회에서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 대통령도 “부끄럽다”는 표현을 썼다. 그리고 대안을 만들었다. 박대표가 수도이전 공약을 뒤엎은 뒤, “천번 만번 사과할 수 있지만 대안을 만들겠다”고 선언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박대표와 이명박 대통령의 행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박대표에 대해 야속하게 생각할 수 있다. 박대표의 수도분할 안에 대해 가장 강력히 반대했던 인물이 바로 서울시장 시절의 이명박 대통령이었고, 이미 입법은 물론 집행까지 되는 안에 대해 대선 후보로서 이를 뒤엎을 수 없었던 이명박 대통령의 비애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박대표의 원칙이 흔들리게 된다. 국민 앞에서의 원칙과 신뢰는 모든 정치인이 추구하는 바이다. 입으로만 하느냐 실천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원칙과 신뢰를 부정하는 정치인은 없다.

    남의 상황을 감안해주지 않는 원칙은 퇴색

    다만 2002년부터 2007년까지의 노무현 대통령 집권기는 탈당, 분당, 합당이 반복되면서 한국 정치 역사상 가장 격변이 자주 일어났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서 자신의 원칙을 그대로 지킨다는 것은 정치인이 아니라 논객의 입장에서도 어려웠다. 단적인 예가 한명숙, 원희룡 등 지금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 선언한 정치인들이 수도이전을 찬성했다는 점이다. 과연 이 둘이 서울시장 선거에서 여전히 수도이전을 주장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들을 비판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만큼 격변이 많았던 시절이었다는 것이다.

    박대표가 원칙과 신뢰를 주장할 때, 남의 상황도 감안해주어야할 이유이다. 박대표가 총선 당시 수도이전론을 찬성하고 엎을 수밖에 없는 속사정이 있듯이, 이명박 대통령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남의 상황을 이해하지 않는 원칙은 자기중심주의로 퇴색된다. 지금까지의 세종시에 관련한 박대표의 입장이 딱 그렇다.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터놓고 고백하며 대화하는 것이다. 이 작업을 할 수 있어야만 박대표의 원칙도 되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미디어워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