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미국식 대통령제의 확립
    2.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
    3. 70만 대군의 육성
    4. 농지개혁
    5. 교육의 기적
    6. 양반제도 철폐 및 남녀평등 구현
    7. 기독교의 확산

  • ▲ 유영익 교수 ⓒ 뉴데일리
    ▲ 유영익 교수 ⓒ 뉴데일리



     이승만 대통령은 해방공간의 대혼란을 수습하고 대한민국을 수립한 지 2년만에 6.25전쟁을 맞아 이를 극복하면서 신생공화국의 기초를 닦는데 주력한 결과 정치, 외교, 군사, 외교, 교육, 사회, 문화·종교 등 여러 분야에서 획기적인 업적을 성취하였다.
    그가 이룩한 업적들 가운데 ①미국식 대통령제의 확립, ②한미상호방위조약의 체결, ③‘70만 대군’의 육성, ④농지개혁, ⑤‘교육 기적’, ⑥양반제도의 근절 및 남녀 평등의 구현, ⑦기독교의 확산 등은 그가 아니면 실현될 수 없었던 그 나름의 고유한 업적이었다. 그리고 이들 ‘7대 업적’은 그가 현대한국에 남긴 유산(遺産)이었다. 대한민국은 바로 이 유산을 바탕으로 1961년 이후 공전의 ‘비약적’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대통령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간 집권하면서 해방 전후에 미리 준비했던 건국 구상에 따라, 정치, 외교, 군사, 경제, 교육, 사회, 문화·종교 등 여러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달성했다. 그 중에서 돋보이는 것들을 골라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대통령 중심제, 언론자유 허용, 양당제도의 발달, 지방자치제 도입

     1. 정치 분야에서 그는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대통령 중심제 정부를 확립하였다. 1948년 제헌 당시 그는 국회의장으로서 헌법기초위원회가 기초(起草)한 내각책임제 헌법 초안을 대통령 중심제로 바꾸도록 압력을 가하여 자기 뜻을 기어이 관철시켰다. 1952년에 그는 제1차 개헌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하고, 1954년에 제2차 개헌을 통해 국무총리제를 폐지함으로써 대한민국을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미국식 대통령제를 모방한 나라로 만들었다. 그는 제1차 개헌 때 발족시킨 자유당이라는 관제 여당을 앞세워 8년간 ‘거의 전제적(專制的)인’ 권위주의적 통치를 실시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언론의 자유를 비교적 폭넓게 허용하고, 선거 및 의회제도를 존중하며, 양당제도의 발달을 용인하고, 지방자치제를 도입하는 등 적어도 형식상 민주주의의 외피(外皮)를 유지함으로써 한국민의 민주적 자치능력 개발에 기여하였다.

    '평화선' 선언...독도의 영유권 확립, 용미(用美)외교로 한미방위조약 체결 

    2. 외교 분야에서 그는 대한민국 수립 후 유엔과 미국 등 30여개 국가로부터 승인을 획득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확립하였고, 1952년에는 ‘인접해양에 관한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일명:‘평화선’ 혹은 ‘이승만

  • ▲ 독도를 지켜낸 '평화선' 선포 ⓒ 뉴데일리
    ▲ 독도를 지켜낸 '평화선' 선포 ⓒ 뉴데일리

    라인’)을 일방적으로 선포하여 독도(獨島)를 포함한 해역에서 어족자원 및 해저자원을 보호하였다. 그는 특히 6.25전쟁 막바지에 미국이 단독으로 휴전을 모색하자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대통령 등 미국의 위정자들을 회유 내지 협박하여 1953년 10월에 한미상호방위조약(The Korean-U.S. Mutual Security Treaty)을 체결하는데 성공하였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성립됨으로써 19세기 후반 이래 14년에 한번씩 전화(戰禍)가 휩쓸었던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며, 남한은 미국이 제공하는 군사적 보호우산 아래 정치, 안보, 경제, 교육,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공전(空前)의 발전을 기할 수 있게 되었다.

    역사상 최대 병력 양성, 미국 군사원조 끌어내
    아시아 군사강국으로

     3. 군사 분야에서 그는 6.25전쟁 발발 후 유엔군과 긴밀한 공조관계를 유지하고 또 남한국민 대다수의 충성을 확보함으로써 북한 침략군과 중공군을 휴전선 이북으로 격퇴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전쟁기간에 미국에 끈질기게 군사원조를 요청한 결과 전쟁 발발 전에 10만 명에 불과했던 한국군의 규모를 1954년에 ‘70만’ 수준으로 대폭 증군(增軍)하는데 성공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는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상비군을 육성, 보유함으로써 대내적으로 안보를 확보하고 대외적으로 대한민국을 아시아에서 무시 못할 군사강국으로 격상시켰다.

  • ▲ 1959년 국내 원자력발전소 1호 기공식. 만성적 전력난을 벗어나는 결정적계기였다. ⓒ 뉴데일리
    ▲ 1959년 국내 원자력발전소 1호 기공식. 만성적 전력난을 벗어나는 결정적계기였다. ⓒ 뉴데일리

    농지개혁 성공...자작화 90%, 농민공산화 막고 수입대체산업 육성

     4. 경제 분야에서 그는 대다수 국민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는데 실패했지만 만성적인 인플레를 극복하고, 전후(戰後) 경제복구에 성공하였으며, 수입대체산업(輸入代替産業)을 육성함으로써 공업화의 단초를 열었다. 특히 그는 6.25전쟁 발발 전에 개시된 농지개혁을 통하여 구래의 지주 토지 소유제를 청산하고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따른 자작농적 토지 소유제를 확립하였다. 이대통령이 추진한 농지개혁을 통해 총 소작지 면적의 40%에 달하는 58.5만 정보의 땅이 유상매입, 유상분배의 원칙에 따라 소작농들에게 분배되었다. 정부가 매수·분배한 토지 이외에 지주들이 농지개혁 실시 이전에 임의로 처분한 토지가 약 71.3만 정보 있었다. 여하튼 농지개혁 기간에 정부분배 농지 58.5만 정보(45%)와 지주처분 농지 71.3만 정보(55%)가 자작화(自作化)되었다. 이로써 전체 면적에 대한 자작지의 비율은 92.4%에 달하게 되었다. 해방 당시 자작지 면적이 35%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92.4%라는 수치는 한국 농업구조상 획기적 변화를 의미했다. 이는 전후 일본이 토지개혁을 통해 달성한 자작화률 90%를 능가하는 수치였다. 농지개혁은 대다수 농민을 지주제의 속박과 착취에서 해방시키고, 남한의 농업 생산성을 높이며, 한국 자본주의를 태동시키는데 기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6.25전쟁 발발 전에 농지개혁이 개시됨으로써 전쟁 중 남한 농민들이 북한군에 부역하는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국민80% 문맹 퇴치, 대학생수 영국 수준, 해외유학 강화...민주주의-경제 발전 인력 급증

     5. 교육 분야에서 그는 6년제 의무교육제도를 도입하고 성인을 대상으로 문맹(文盲)퇴치 운동을 전개한 결과 1959년까지 전국 학령아동의 취학률을 95.3%로 높이고 해방 당시 80%에 달하였던 문맹률을 22%(남 11%, 여 33%)로 낮추는데 성공했다. 나아가 이대통령의 정부는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대폭 증설하고 해외유학을 장려함으로써 산업화에 필요한 고급인재를 양산했다. 해방 당시 우리나라의 대학과 전문학교는 통털어 19교, 학생수는 약 8천명이었는데 1960년에는 초급대학·대학·대학교가 68교, 학생수는 약 10만으로 폭증하였다. (대학생 수 10만명은 인구 5천만이 넘는 영국의 대학생 수와 맞먹는 것이었다.) 이대통령 집권기에 해외 유학생의 수가 비약적으로 늘었다. 1953년부터 1960년까지 ‘정규유학생’ 자격으로 해외로 나간 학생이 4,884명(미국 유학생 89.9%), ‘기술훈련 유학생’ 자격으로 출국한 학생이 2,309명이었다. 이 밖에도 1950년대에 9,000명 이상의 군장교들이 미국의 각종 군사학교에 파견되어 교육을 받았다. 요컨대, 이대통령 집권기에 한국에는 ‘교육 기적’이 일어났고 이 기적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는 민주주의가 정착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으며 1960년대 이후의 ‘경이적’ 경제발전의 지적 기반이 조성되었다.

    양반제도 뿌리 뽑고 여성해방, 남녀교육 평등, 여성 엘리트 사회진출 활발

     6. 사회 분야에서 그는 농지개혁을 통하여 전통적인 양반제도를 뿌리뽑고, 남·녀에게 동등한 교육 및 취업 기회를 정책적으로 보장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평등화에 획기적으로 기여하였다. (발표자는 농지개혁이 양반제도 근절의 최대 요인이었다고 판단한다.) 이대통령 집권기에 한국 여성은 초등학교 수준에서 남자와 똑같은 의무교육을 받게 되었고 나아가 중·고등학교 및 대학에 대거 진학하기 시작하였다. 1958년 각급 학교의 여학생 수를 해방 직후와 비교해보면, 초등학교의 경우 3.1배(541,011→1,655,659), 중·고등학교의 경우 6.1배(63,516+23,721→88,625+6,469), 사범학교의 경우 2.5배(1,825→4,527), 그리고 대학(교)의 경우 8.5배(1,086→9,189)로 폭증했다. 교육기회의 확대에 따라 여성의 취업기회가 확장되고 사회진출 역시 활발해졌다. 저학력 여성들은 타자수, 교환수, 섬유노동자, 직조공, 피복공 등 직종에 취업하는가 하면 고학력 여성들은 교원, 의사, 약제사, 경찰관, 공무원, 사무원 등 과거에 남성들이 독점했던 직종에 침투했다. 비록 그 수가 많지 않았지만 1950년대에는 여성 판·검사, 여군 장교, 여자 항공대원, 여자 공학사가 나타났고 국회의원과 장관 및 대사들도 등장하였다. 한마디로, 조선시대 이래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차별대우를 받았던 한국의 여성이 이대통령 집권기에 “가정의 깊은 장막 속에서 벗어나 눈부신 각광을 받으면서 사회의 밝은 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한글전용' 시대 개막, 기독교 세력 활용...교세 크게 확장

     7. 문화·종교 분야에서 그는 한글전용 정책을 여행함으로써 본격적인 ‘한글시대’를 개막하고, 전통문화의 계승 및 보존을 위한 조치를 강구함으로써 민족문화 창달에 기여하였다. 특히 그는 헌법에 명시된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을 형해화(形骸化) 시키면서 기독교(주로 개신교)를 장려함으로써 원래 유교국가였던 한국을 아시아 굴지의 기독교 국가로 탈바꿈시켰다. 그는 ①국가의 주요 의례를 기독교식으로 행하고, ②국기(國旗)에 대한 경례를 주목례(注目禮)로 대체하며, ③형무소에 형목제(形牧制), 그리고 군대에 군목제(軍牧制)를 도입하며, ④정부의 주요 부서에 기독교인을 대거 등용하며, ⑤기독교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언론매체의 발달을 지원하며, ⑥6.25전쟁 중과 그 후에 외국(특히 미국)의 기독교 구호단체들이 보내오는 구호금과 구호물자를 친여(親與)적인 ‘한국기독교연합회(KNCC)’를 통해 배분하도록 조처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기독교 교세확장에 기여하였다. 이대통령집권기에 정부의 19개 부 장·차관 242명 가운데 38% 그리고 국회의원 200명 가운데 약 25%가 개신교 교인이었다. 각 부처의장 135명 가운데 개신교인의 비율은 47.7%였다. 그 당시 남한의 총 인구 중에서 기독교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10% 미만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정부의 요직에 기독교 교인이 과(過)대표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결과 이 대통령 집권기를 고비로 남한의 기독교 교세는 ‘기하급수적’ 성장을 기록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