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생이 읽어 본 건국대통령 스토리 '이승만과 그의 시대'

    이승만은 외롭다

     
    김나영 (이화여 경영학과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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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야흐로 스타일 정치의 시대다.
    트위터를 통해 파격을 연출하는 정치인이 주목받는가 하면 비속어와 은어가 넘쳐나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광대’에 가까운 포지션을 가진 사람도 화제가 된다.
    시민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지도자의 국정철학, 전문성과 같은 주제들이 아니라 ‘어떻게 나에게 어필할 수 있느냐’다. 말 그대로 연예인을 보고 즐거움을 느끼듯, 철학과 가치를 판단하지 않고 정치가를 선택하는 시대다. 그러나 매체를 통해 단발적으로 즐겁게 감상하면 그만인 연예인과 달리, 위정자는 우리의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

    ‘이승만과 그의 시대’는 ‘스타일리쉬한 정치’와는 정 반대인, 우직한 지도자의 일대기를 담담하게 다룬다.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을 최대의 가치로 여기고, 자신의 지분보다는 민주공화정의 대의를 위해 일생을 바친 정치인의 삶을 써 내려 간다.

    다만 그가 직면할 수 밖에 없었던 한계는 혼란의 시대를 살았다는 점이다. 국민에게 공감을 구하고 감성적인 지지를 얻는 것보다, 국가의 정체를 안정시키는 것이 시급했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소통 코드를 만들고, 여러 일화를 창출하기도 전에 6.25가 벌어졌고, 관료들의 실정과 혼전 끝에 하야해야만 했다.

      그 탓일까, 우리의 기억 속에 이승만의 기록은 상실되어 있다.
    미국의 링컨, 워싱턴 대통령은 기억하면서, 정작 우리나라 건국 대통령이 어떤 희생과 고난을 감수해야 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철저히 외면 받고 있다.

    이승만이 세상을 떠난지 5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는 국가의 기초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란에 휩싸여 있다. 심지어는 ‘자유민주주의’가 과연 헌법 정신을 대표할 수 있는 단어인지에 대한 의문까지 일고 있다.
    일련의 혼란은 건국의 최대 공헌자가 수호하려 했던 가치, 희생과 관련된 일체의 언급이 잊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승만 대통령은 ‘혁신적인 리더’(Innovative Leader)로 다시 조명되어야 한다.
    단순히 정부를 재편했던 정치가라거나, 전략적 외교의 한 축에 서 있었던 전문가이기 전에, 혁신적인 사상과 믿음을 가슴에 품고 있었던 리더였던 것이다.

    경영학자 제임스 마치(March)는 혁신적인 조직의 리더는 기존 전략의 생산적인 ‘활용’(Exploitation)과 도전적인 ‘탐색’(Exploration)을 동시에 소화해 낼 수 있는 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냉전체제로 돌입하기 직전의 1940년대를 살았던 이승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균형감각이었다.
    집단사고(Groupthink)에 빠진 독일과 일본을 곧바로 대체할 것으로 보이는 차세대 강대국들의 첨예한 대립을 미리 내다 본 안목인 셈이다.

    약관의 나이에 양심적인 민주 공화정치의 실현을 외치며 강력한 행동으로 데뷔했던 ‘베테랑 정치가’가 주목한 것은, 노련한 대미 외교를 통한 실리 추구뿐이 아니었다. 당당한 독립 정체로서 연합군의 대열에 참가하여 장차 동북아의 새로운 판도를 짜는데 기여하는, 혁신적인 접근법을 고민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승만의 전반생은 명분과 절대선에 집착하는 역사관(歷史觀)으로는 좀체 긍정적으로만 보기 어려운 면이 많다. 이론과 달리 필드의 전략은, 그럴듯한 철학이나 의도보다는 상황 기반적인 대응이 더 중요한 탓에 ‘실천’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정치가와 선비의 개념을 동일시하는 전통적인 시각으로는 이승만의 삶을 해석하기에 무리가 따른다.
    다양한 스펙트럼이 공존하는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그럴듯한 ‘비전’보다는, 갓 태어난 대한민국의 생존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던 그는, 직선적인 윤리학의 잣대로는 마땅히 비판 받아야 할 인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외교무대와 경제 통상의 필드에서 견지하려 하는 ‘용’(用)의 가치, 실현 가능성과 구체성의 관점에서 보면 이승만은 지극히 현실에 충실한 혁신가로 평가 받아야 마땅하다.

    삼백(三白)산업을 진흥시켰던 경제 감각과, 일본 관료 경력을 가진 전문가들의 적절한 활용은, 획일적인 관점을 가졌던 독립 운동가들과 차별화되는 행동이다. 많은 사회학자들은 이승만 정권의 가장 큰 공적이 ‘우수한 인적 자원을 남긴 것’이라고 얘기한다. 명분보다 실리에 무게를 둔 행보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대목이다.
    비록 일제시대에 입신(立身)의 초창기를 보냈다는 비판을 받지만, 신현확 전 총리나 김정열 전 총리와 같은 이들은 이승만에 의해 그 가능성을 주목받고, 국가의 발전에 공헌한 인재들이었다.

     물론 이승만 정부가 남겼던 과오를 외면해서도 안 된다.
    민주주의의 절대적 가치라는 관점에서 보면 많은 제도적 모순과 탈법이 미결 과제로 남았던 시대였다.
    정부의 수반으로서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책임 있는 지도자가 되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개헌 시도와 공권력 개입의 전력은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건국/중흥 지도자들이 갖고 있었던 모순적 요소들에 비하면, 이승만 대통령은 비교적 성숙한 방식으로 정치 무대에서 물러났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워싱턴, 드골, 비스마르크와 같은 정치가들의 기록에서도 권력 연장의 욕구를 종종 발견하게 된다. 이는 모든 국가에 적용되는, ‘불편한 진실’로 해석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희생적인 치적의 이면에는 공권력 독점의 욕망과 복잡한 이해관계의 단면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일찍이 사회심리학자들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리더에게는 ‘불멸의 욕구(Needs of Immortality)’, ‘역사에 짙은 흔적을 남기고 사라지려는’ 집착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이승만 대통령에게만 책임을 돌리기보다는, 아직까지 사회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던 초기 대한민국의 정치적인 조건과도 결부 지어서 생각해야 할 문제다.

     어쩌면 이제 편히 쉬셔야 할 건국대통령께서 아직도 논란의 소용돌이에서 나오지 못하고 계신 가장 큰 이유는, 후세가 그의 삶을 입체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껏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을 둘러싸고 피상적인 접근법을 적용하는 데 급급해 왔다.
    일각에서는 그의 전반생을 다루면서 ‘민주 공화주의자의 사명으로 가득 찬 삶’이라고 획일화 했다.
    다른 이들은 ‘친미주의자’ 또는 ‘조정의 명수’로 비판해 왔다. 그러나 제한적인 초기 대한민국의 사회적 조건과 혁신형 리더쉽의 관점에서 보면, 이승만은 많은 업적과 함께 한계 또한 스스로 짊어져야 했던 리더였다.

    정치가에게 있어 국가의 지도자라는 규정은 많은 이들의 의견을 종합적으로 안고 가야 하는 숙제를 남긴다. 그러나 지도자와 경영자가 ‘대리인’(Agent)이라는 지적도 있듯, 유한한 시기를 사는 이에게 너무 많은 성과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렇기에 서둘러 이승만 대통령의 ‘어려움과 잘못’을 덮어버려서도 안될 것이며, 그의 모든 삶을 타협과 권력 연장에 일관한 시대로 치부해 버려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이승만과 그의 시대’라는 저작이 너무나도 소중하지만, 아직까지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던지는 메시지는 약하다고 느껴지는 것 또한, 이 때문이다. 지도자의 삶을 평면적으로 기술하기보다는, 외롭고도 치열했던 혁신가의 전반생에 나타날 수 밖에 없었던 역설(逆說)에 주목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이제 우리는 건국 대통령의 공과 과를 ‘기록’으로 논증하는 데서 더 나아가 그 존재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고민할 때다. 설익은 담론이 정책으로 부풀어오르고, 국가의 향배를 결정짓는 이 시대에, 굳건한 리더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지도자 상이 절실하다.

    조금 멋없고 구시대적인 수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를 향해 끊임없이 성찰과 번민을 반복했던 노정치가의 경륜과 과정에도 고민이 필요하다. 이제껏 ‘이승만의 재조명’을 외치는 거대담론은 보았으되 ‘우남 리더쉽’이나 ‘우남 정치 경제학’과 같은 시대적 의미를 밝히는 노력을 발견하지 못한 이유 또한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이성보다는 감성과 욕구에 충실한 이 시대에, 이승만 대통령은 아직껏 외로운 존재로 남아 있다.
    지도자는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는 비전 하나만으로 희생의 길을 걸어가기도 하고, 과감하게 후세에 그 업적을 이전하기도 한다. 공동체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비판과 해체의 과정을 거듭하기 전에, 전대(前代)의 유산이 의미하는 바를 깊이 곱씹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제, 다시 혁신가 이승만의 삶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비전을 수립해야 할 때이다.

    *편집자: 이 글은 김나영씨가 모단체의 안보 서평 공모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논문입니다.
                '이승만과 그의 시대'는 뉴데일리 이승만 연구소 공동대표 이주영 교수(건국대 명예교수)가
                연구소총서-2로  출간한 저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