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광동 객원논설위원 (재미 언론인) 
    ▲ 조광동 객원논설위원 (재미 언론인) 

    29년 전 광주가 피투성이로 신음할 때 저는 오랫동안 한국 신문을 읽지 않았습니다. 잔인한 권력의 총칼 앞에 무릎을 꿇은 언론의 곡필을 소화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최근 노무현 자살 추모 국민장이 실시되는 동안 한국 언론을 외면했습니다. 군중 독재에 부화뇌동하는 언론이 너무 천박했습니다. 전두환을 위대한 영웅으로 미화했던 한국 언론들은 노무현을 영웅처럼 각색하고 있습니다. 1980년도 한국 언론의 곡필은 포악한 군사 독재에서 꼭두각시로 날뛴 극우세력의 산물이었고, 2009년도 조국 언론의 왜곡은 극좌세력이 홍위병으로 날뛰는 광분한 집단이 만들어냈습니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로 언론의 힘을 강조하지만 그것은 그래도 이성이 살아있는 사회에서 가능한 신화이지 이지를 상실한 집단문화 속에서는 먼 나라 전설입니다. 총칼을 든 군인들 앞에 목숨을 걸 수 있는 언론이 흔치 않듯이 광기로 최면된 군중들 앞에 직필을 할 수 있는 언론은 찾기 어렵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이 글을 쓴다면 제 언어선택이 지금보다 조심스럽고 수세적일 것입니다. 이것은 언론인으로 제가 갖는 한계이자 인간의 유약함입니다. 언론인의 한계를 몸으로 안고 살아 온 사람으로 저는 조국 언론이 노사모 홍위병들의 눈치를 보는 심정과 좌절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이 심했습니다.

    아무리 억울해도 법과 이성으로 대처하는 선진사회가 있지만 조금만 억울해도 미친듯이 광분하는 후진사회가 있습니다. 선진과 후진 사회의 차이 중에 하나는 분노를 조절하는 이성의 능력입니다. 언론에게 재갈을 물릴 수 있는 사회에는 그것이 권력이든 군중이든 서로가 다른 것을 수용하지 못하고 분노를 절제하지 못하는 극단주의 광기가 깔려 있습니다. 극단주의 광기 문화는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리는 떼쓰는 문화와 미친 듯이 무리를 짓는 떼거리 문화에 가세해서 사회의 역사를 파괴적으로 만들고 비극적으로 몰아갑니다.

    한국인에게는 광기 문화와 떼 문화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조국과 떨어져 조국을 먼 숲으로 바라보면 한국인의 광기 문화와 떼 문화가 더욱 확연하게 보입니다. 아무리 아니라고 우기고 싶어도 어쩔 수 없는 우리들 실체입니다. 1980년 암울한 독재시절 주한미군사령관이었던 위컴 장군이 한국인을 가리켜 들쥐 같다고 논평해서 저는 발을 동동구르면서 위컴을 욕했던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욕을 하면서도 우리들 문화 유전인자에 들쥐적 떼거리 특질이 있다는 제 가슴을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 때 위컴이 말한 들쥐는 '레밍'(Lemming)이라는 떠돌이 쥐고 떼거리를 짓는 속성을 가졌습니다.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이 나타난 집회에서 껑충껑충 뛰면서 눈물로 환호하는 북한 동포들 속에서 광기와 집단성을 느꼈던 저는 북한 여고생들이 제 손을 잡고 "선생님 우리 함께 위대한 통일의 위업을 이룹시다"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는 모습 앞에 섬뜩함을 느꼈습니다. 천진한 여고생이 통일을 염원하면서 흘리는 눈물은 가짜가 아니었습니다. 이데올로기 프로그램으로 입력된 여고생의 가슴은 통일을 이야기하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흐릅니다. 여고생 눈물에 집단적 광기의 최면이 있다는 것이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노무현 장례식의 모습은 지금까지 노무현 사람들의 행태를 결집시킨 광기 문화와 떼 문화의 종합 작품이었습니다. 자기 잘못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노무현을 영웅으로 만드는 사회는 진정한 영웅을 죽이는 사회입니다. 노무현은 부패 혐의로 재판대에 서야 했습니다. 유죄가 확정될 때까지는 죄인이 아니지만 무죄가 확정될 때까지는 피의자입니다. 검찰이 노무현을 유죄로 몰아갔다고 항변하는 사람들은 법치주의를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검찰이 노무현의 유죄를 단정하고 그것을 입증하려는 것은 당연한 검찰의 임무입니다. 선진국 검찰은 더욱 냉혹하고 추상같습니다.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자살을 한 국가적 수치를 노무현 사람들은 영웅의 축제로 만들고 있습니다. 피의자가 바위산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것은 광기의 극치이고, 노란 풍선과 노란 노무현 사진을 들고 수백만의 광장을 메운 것은 떼 문화의 절정입니다.  여기에 이데올로기에 포로가 된 지식인들까지 앞장서고 있습니다.

    언론의 곡필에 이어 교수들이 곡학에 나섰습니다. 일부 교수들이 시국선언이란 것을 통해 이성을 잃은 노무현 군중들에게 영합하고 선동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를 나섰던 49년 전 교수들의 흉내를 낸다면 역사와 시대를 잘못 읽었습니다. 4.19 당시 교수들의 시위는 지성의 용기였지만 노무현 자살을 두둔하는 교수들의 시국 선언은 편견의 만용입니다. 이데올로기 교수들의 시국선언문은 냉철한 현실 인식과 지성적 객관성이 결여된 편협한 선동문이었습니다. 명색이 교수란 사람들이 노무현의 자살을 억울한 죽음으로까지 미화시키고 있습니다.

    사이비 종교 집단 컬트(Cult)가 사상과 인종과 정치에 도입되면 사람과 시대가 미쳐버립니다. 히틀러 컬트가 독일을 광분케 만들어 역사상 최대의 광란극을 만들었습니다. 문화혁명 컬트가 수백만 중국 인민을 살상하고, 르완다 컬트, 다푸르 컬트가 아직도 수십만 아프리카인을 죽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알카에다 컬트는 지금도 전쟁의 포연을 뿜어 올리고 있습니다. 북한 사회주의 컬트는 수백만 인민을 굶겨 죽이고 인민들을 중국 땅에 거지로 배회케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남한은 노사모 컬트가 나라의 장래를 소용돌이치게 하고 있습니다. 컬트의 바닥에는 언제나 광기와 떼 문화가 있습니다. 광기에 취해 억지떼를 쓰면서 무리를 짓는 떼 문화의 극단주의는 인간과 역사의 적입니다.

    깊은 사고로 이성의 철학을 낳은 독일이 어떻게 히틀러의 광기와 떼 문화를 가능케 했는지는 역사의 불가사의입니다. 독일 국민의 핏속에는 칸트 철학의 이성이 있지만 바그너 음악의 광기가 있었습니다. 히틀러의 광기 문화와 떼 문화는 수백만을 학살한데 이어 독일 분단의 비극까지 야기시켰지만 독일은 광기 문화와 떼 문화를 청산하고 세계의 대국으로 발돋움하면서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위대한 통일을 성사시켰습니다. 그러나 조국은 아직까지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으로 남아서 민족의 한을 영구화시키고 사상과 지역과 계층으로 분단의 연쇄반응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광기와 집단성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광기와 집단성이 헛길로 빠지면 역시가 비극의 수렁으로 떨어지지만 창조적으로 승화되면 위대한 역사의 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한국이 가난을 극복하고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한 밑바탕에는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집단성과 이를 악문 극기와 독기가 있었고, 한국인이 고향을 떠나 맨손으로 이민해 세계 도처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는 저변에는 죽기 살기로 일하는 한국인의 독한 감성이 있습니다.

    조국 동포들은 경제 기적을 이룩했으나 사이비 자유주의로 민족의 심성을 타락시키면서 독재적 권위주의를 청산한다는 이름으로 국가 권위를 흔들고 있습니다. 너도 살고 나도 살아야 하는 상생의 문화가 아니라 너 죽고 나 죽기 식의 극단주의로 가고, 나라를 지탱해야 할 공권력의 권위와 대통령의 권위까지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위컴이 한국인을 모멸한 나그네 들쥐 '레밍'은 바위에서 바다 속으로 뛰어내려 집단 자살하는 속성까지 가졌다고 합니다. 우리는 위컴의 냉소에 분노해야 하지만 들쥐적 속성을 씻어내는 자성의 채찍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광기와 집단성을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열정으로 승화시킬 때 조국은 선진대국으로 도약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