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8일자 오피니언면 '태평로'에 이 신문 박은주 엔터테인먼트부 부장이 쓴 '여자들도 싸워야 한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페일린은 후보 수락 연설에서 자녀 5명을 소개하는 데 1분50초를 썼다. 세 딸 소개에 5초, 두 아들에겐 무려 105초(95.2%). 워싱턴 연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딸 셋에 7초, 아들 둘에 74초. 이게 어느 날 대통령직을 수행할지도 모르는 페일린의 수준이다."

    한 미국인 페미니스트가 9월 3일 인터넷에 올린 글의 제목은 '공화당원의 성차별(Sexism)에 대한 보고:세라 페일린은 여성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동영상까지 첨부해가면서 페일린을 공격했다.

    민주당 지지자가 대부분인 미국 페미니스트들은 요즘 공화당 대통령 후보 매케인이 아니라 같은 여성인 부통령 후보 세라 페일린을 '주적(主敵)'으로 삼고 있다. 대표적 여성운동가이며 오바마·클린턴 지지자인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얼마 전, LA타임스 기고('Palin: wrong woman, wrong message')를 통해 "페일린이 총기 규제에는 반대하면서 권력이 여성의 자궁을 지배(낙태금지)하는 데는 찬성하고 있다"고 맹공격했다. 어떤 페미니스트는 "페일린의 러닝 메이트는 매케인이 아니라 다운증후군 아기"라는 수준 낮은 독설까지 쏟아냈다.

    페일린 지지자들의 반격도 만만찮다. 일부는 "페미니스트 좀비들 물러가라"고 주장하고, TV 토크쇼 사회자인 오프라 윈프리에 대해 시청거부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오바마와 '정신적 오누이' 수준인 윈프리가 페일린이 자기 쇼에 출연하는 것을 반대한 것을 두고 "여성 유권자를 무시하고 있다"며 발끈한 것이다. 이들은 '공화당 출신 최초의 여성 부통령 후보'라는 새로운 여성의 역사에 여성 스스로 재를 뿌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남자들은 '역시 여성의 적(敵)은 여성'이라고 비아냥거리지만, 그만큼 여성적 이슈가 활발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도 '여성 역사를 새로 쓴 여성'을 다른 여성이 검증하고, 비판하는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몇 년 전 한 페미니스트는 "오로지 그녀가 여자이기에 박근혜씨를 지지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다른 여성주의자가 반론을 내놓으며 본격적인 '논의'가 있을 뻔한 적이 있다. 아쉽게도 그 논란 이후, 여성 이슈에 관한 여성들의 '피 튀기는 논쟁'을 찾기는 어려웠다.

    사실 우리 사회에는 '여성 문제엔 관대할수록 좋다'는 암묵적 합의가 있다. 얼마 전 개설된 여성정책연구원의 전업주부 연봉 계산 프로그램 역시 이런 관점으로 만들어졌다. 이 프로그램은 가사를 37개 항목으로 나눠 임금을 계산하는데, 논란이 될 대목이 있다. 예컨대 '쇼핑'과 '아이 보기'가 그 항목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주부가 자기 옷 사는 데 50분, 반찬거리 사는 데 10분이 들었다면 진짜 노동시간은 몇 분인가. 아이와 노는 시간은 노동인가, 레저인가. 분노한 '마초'가 아니라, 여성 스스로 이런 문제를 제기한다면, 우리는 꽤나 성숙해 보일 것이다.

    여성에 관한 '무조건 관대한' 시선의 문제는 이런 태도가 여성 문제에 대한 근원적 토론을 어렵게 하고, 더 높은 차원의 정책 발전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간통죄 및 혼인빙자 간음죄 존속 여부, 출산장려제, 낙태금지법, 성매매와 관련해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 여성들이 나서 심도 깊은 토론을 가진 적이 있었던가. 인간의 성(性) 결정권을 주장하는 진보주의자가 사법부의 개인 침실 감시를 인정하는 간통죄를 찬성하는 것과 같은 논리적 모순에 대해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토론을 한 적이 있었던가.

    '단지 우리가 여자라는 이유로' 서로를 논박하지 않는다면, 여자가 여전히 마이너리티에 불과하다는 얘기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페일린과 페미니스트들의 싸움, 그들 여자들의 싸움,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