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1일자 오피니언면 '태평로'에 이 신문 박은주 엔터테인먼트부장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며느리도 몰라."

    오래 전 고추장 CF에 나온 이 말은 한국의 '장인(匠人) 정신'의 상징이기도 했다. "고려청자 비법이 끊긴 것은 아들에게도 비법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거나, 맛있는 냉면집에선 "주인 할머니가 밤에 몰래 육수에 비장의 무언가를 집어 넣는다"는 얘기가 돌기도 한다. 대중에게 뭔가를 감추면서 애타게 하는, 이른바 '신비주의' 마케팅의 원조는 연예인들이 아니라, 맛집 주인들이었던 것 같다. 그들에겐 보통 식당이 따라잡을 수 없는 '특별한 뭔가'가 있어 보였다.

    며칠 전 광화문의 소문난 식당을 찾았다. 메인 요리도 그렇지만 밑반찬만으로 돈이 아깝지 않은 집이었다. 그러나 그날 밑반찬이 차려졌을 때, 뭔가 '이'가 빠진 느낌이었다. 최소한 19년은 그 자리에 있었던 명물 고추장아찌 대신 다른 식당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찬이 나왔던 것이다. 기다리기에 지쳐 짜증날 때쯤 나오던 국수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나왔다. 그러나 아뿔싸. 국수는 퉁퉁 불어 있었다. 된장찌개도 예전만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언제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주인할머니가 얼마 전 세상을 뜬 탓이다. 이 집만 그런 것도 아니다. '대(代)를 이은 맛집'의 상당수에서 이런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손이 너무 많이 가서' '원가가 너무 들어서' '그렇게 만들려면 따로 주문을 해야 해서' '빨리 달라는 손님들 때문에' '새 주인이 이게 더 좋다고 해서' 슬슬 '원칙'을 깨버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새파란 주인들이 '○○○할머니'란 이름을 달고 프랜차이즈점을 낸 집에서도 이런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요즘 종로, 광화문 일대에 '재개발' 바람이 불면서 "부동산개발이 맛집 맥을 끊어놓는다"는 얘기들이 많다. 하지만 그보다 좀 더 근원적 문제는 맛집 스스로 맛으로 승부하기를 포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맛집의 '비밀'이란 대단한 비밀의 양념이 아니라 '맛에 관한 원칙'을 지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손님이 많아도 국수는 손님이 주문하면 바로 삶아낼 것, 밑반찬은 공장 같은 데서 나오는 것 말고 직접 갈무리해서 최소한 몇 달 전에 준비할 것, 같은 것들 말이다.

    맛이 달라지는 건 할머니들이 '비밀'을 무덤으로 갖고 가서가 아니다. "며느리(2,3세)도 몰라서"가 아니라 "며느리가 하기 싫어서"인 셈이다.

    그러나 한정된 맛집의 숫자에 비해 신문, 잡지, 방송, 인터넷 블로그 등 다양한 '채널'을 가진 우리 요식업계의 환경 때문에, '초심을 잃은 맛집'의 명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우리 맛이 좋은 것'이라는 신념이 확산되면서 그럴듯한 서양식 레스토랑뿐 아니라 꾀죄죄한 한식당들도 주목을 받고 있다.

    문제는 이런 집들이 '맛집'으로 등극하는 데 관록과 경험이 있는 이들보다는 '사진기를 든' 신세대 식도락가의 비평이 더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몇대째 이어온 집'이라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 누추한 인테리어, 그리고 몇 장의 잘 찍은 사진만 있다면, '손맛 깊은 집'으로 등극하는 건 그리 어렵지도 않다. 누구나 맛을 평가할 수는 있지만, 아무나 제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비극은, 아마추어들이 떠들기 시작하면 "이 집은 더 이상 맛집이 아니야"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는 '고수'들이 그냥 입을 닫아버린다는 것이다. 맛보다, 멋, 그보다 겉멋에 더 크게 반응하는 게 세상이라면, 그냥 그렇게 살라고 놔둬 버린다는 것이다. 이건 식당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라는 게 더 큰 비극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