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뉴데일리 토론방에 시민논설위원 '자유야'가 쓴 것 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사색과 토론을 위해 소개합니다>

    헤겔은 이성을 국가와 동일시했다. 국가를 이성의 완성태로 보았다는 것이다.
     
    헤겔은 이성이 곧 현실이라고 했고, 이성이 곧 현실이라면 이성을 국가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는 헤겔에게 이성과 현실과 국가는 모두 등가라고 할 수 있다. 이성이 곧 현실이라면, 국가가 곧 현실이 되는 것이다. 해서 헤겔의 현실은 '있는 현실'이고, 이성은 곧 '있는 현실'이 되는 것이다.
     
    헤겔의 현실론 내지는 국가주의는 흔히 제국주의를 옹호한 이론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않은 게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맑스의 공산주의 이론과 하이데거의 현상학 내지는 생의 철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맑스는 헤겔의 이론을 뒤집었다. 맑스는 이성은 곧 '있는 현실'이 아닌 '있어야 할 현실'이라고 보았고, 또 국가가 이성이 아니고 반국가가 이성이라고 보았다. 맑스는 국가 해체야말로 이성의 완성태로 보았고, 그러므로 온전한 이성은 현실에서 아직 구현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다.
     
    맑스는 이성을 보이콧한 것은 아니었다. 헤겔의 '있는 현실'이라는 이성을 '있어야 할 현실'로 대체했던 것 뿐이었다. 맑스의 헤겔 뒤집기는 이성적 접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하이데거는 이성의 히체에서 헤겔의 비판의 단초를 마련하고 출발한다. 이성의 한계에서 헤겔 비판의 단초를 찾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이성 이전의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의 탐색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성 이전의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의 탐색이었다는 점에서 하이데거의 헤겔 비판은 신비론과 연결되는 성향을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다.
     
    맑스와는 달리 하이데거는 이성 이전의 보다 근원적인, 원초적인 것에 시선을 맞춤으로서 헤겔의 국가주의 내지는 현실론을 대체하려 했다는 점에서 이성의 해체 내지는 비이성적 접근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이데거에 있어서는 현실은 곧 비이성이요 비이성이 현실이었다는 것이다.(여기서 사용되는 이성, 반이성, 비이성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을 듯 싶다. 여기서 이성은 헤겔적 이성이고, 이성에 반대로 반이성을 의미한다. 비이성은 이성의 반대가 아니고, 이성 이전의 근원성을 의미한다.)
     
    제국주의를 옹호한 혐의가 있는 헤겔의 이성론 내지는 국가주의에 반발해 맑스가 '있어야 할 현실론'을 주장하고 하이데거가 '존재자 이전의 존재'즉 '이성 이전의 비이성'에 대한 물음에 천착한 것은 타당성과 의미가 있었던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헌데, 이들 시도의 결과는 오히려 헤겔의 국가주의보다 더 참혹한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을 역사가 입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세기 역사는 온통 이메 대한 증언이요, 실증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비이성은 히틀러를 낳았고, 나찌즘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나찌즘이 인류에 대해 저지른 참상이 어떠했던가는 더이상의 군소리가 필요없는 일이 될 것이다.
     
    맑스의 있어야 할 것으로의 이성론 내지는 반국가주의는 스탈린의 공산주의를 낳았고 모택동의 문화대혁명을 낳았고, 폴포트의 대학살 킬링필드를 낳았다. 공산주의가 얼마나 반인간적이요 폭압적이었다는 것은 이 역시 더이상의 군소리가 필요없는 일이 될 것이다.
     
    헤겔의 국가주의를 반대하고 일어선 맑스나 하이데거의 이론이 20세기에 들어와서 모두 끔찍한 전체주의를 탄생시키고 있고, 이와 연결된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는 오른쪽으로, 하나는 왼쪽으로.
     
    헤겔의 현실론 내지는 국가주의를 섣불리 해체하거나 뒤집으려는 시도는 넌센스가 아닌가 싶다. 20세기 역사가 이를 실증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실상, 통상적으로 볼 때, '있는 현실'이 이성으로 경험되는 것이며 국가가 이성의 완성태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있는 현실' 즉 이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것은 거의 정답에 가까운 얘기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칙에 부합되어오는 얘기라는 것이다.
     
    국가가 곧 이성이라는 사실을 어느 수준까지는 인정해야 하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거라는 것이다. 물론 국가 곧 이성이라는 관점이 '절대적 국가주의'로 흘러가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다. 현실에서 절대적인 것은 없는 것이다. 모든 게 상대적인 거지. '절대적 국가주의'를 경계한다는 차원에서, 그 전제하에 국가주의는 곧 이성의 형성이요 담보인 것이다.
     
    우리나라 사회는 국가를 부정한다. 대한민국을 부정한다. 국가 대신 거기에 민족을 세운다. 일민족 이국가로 갈려 있기 때문에 남한이나 북한이나 임시국가이며, 국가성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본다.
     
    민족이 국가를 대체하면 이성은 '있어야 할 현실'이 되어버리고, 국가주의는 반국가주의로 대체되고 국가 해체가 정의가 되어버린다. 대한민국 해체라는 '있어야 할 현실'이 이성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해체되면 결국, 맑스와 하이데거의 이론이 도달했던 지점, 전체주의 체제에 가 닿게 될 수 밖에는 없다. 민족이 국가를 대체한 경우의 궁극이다.
     
    우리나라는 학교에서 민족을 가르치지 국가를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민족이 국가를 대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주의를 턱없이 폄훼하고, 터부시한다. 국가주의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파시즘을 연상시키는데, 이야말로 잘못된 이해이다. 파시즘은 오히려 국가주의에 대한 안티를 탐구하는 중에 도래한 변종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민족이 국가를 대체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반이성이다. 헤겔의 관점에서 볼 때 그와같다. 아직까지는 헤겔의 관점을 능가할 만한, 관점이 나왔다고 보기 어렵다.
     
    우리나라 사회가 아이들에게 반이성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일이다. 아이들에게 반이성을 가르치는 사회는 미친 사회요, 결코 미래가 있을 수 없는 사회이다. 아이들에게 반이성을 가르치는 사회란, 그 자체가 이미 디스토피아적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좌익이 장악한 방송과 포털이 유포하는 유언비어와 날조에 동원되어 나온 수동적인 아이들이 촛불을 들고 마치 자신들이 보편과 먹거리의 안전을 위해 능동적으로 희생을 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드는 생각이다. 우리나라 사회가 아이들에게 반이성을 가르치고 주입했고, 그 반이성을 가르치고 주입한 결과가 이렇게 나타나는 것이로구나 하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에 미래가 있을까.
    자기 아이들에게 반이성을 가르치는 이런 나라에, 본인은 미래는 없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