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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19일자 오피니언면 '시시각각'에 이 신문 김진 논설위원이 쓴 '엠비(MB), 이니셜의 운명'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정치 지도자의 이니셜에는 운명의 바코드가 숨어 있는 것 같다. YS(김영삼)는 Young Statesman(젊은 정치가)이었다. 그는 실제로는 1928년 12월생(음력)이라고 한다. 그러니 탄생 25년5개월 만에 금배지를 달았다. 한국 정치 사상 최연소다. 그는 40대 기수론을 치고나간 첫 세대이기도 하다. DJ(김대중)는 평생 Democratization Jungle(민주화의 정글) 속에서 싸웠다. Journey(여정) 대신 Jungle을 쓴 것은 그만큼 투쟁이 험악했기 때문이다. JP(김종필)는 Just Political(본질적으로 정치적)한 인물이다. 그는 권력의 생리를 꿰뚫었고 노련한 처세술로 만년 2인자 자리를 누렸다.
MB(이명박)에는 여러 개의 바코드가 들어있다. 마치 그의 인생을 예정해 놓은 듯하다. 현대건설 시절 MB는 Mobile Bulldozer(이동이 편한 불도저)였다. 태국의 고속도로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에서, 한국·중동·동남아 건설 현장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과 현대를 밀어붙였다. 입사 12년 만인 1977년 그는 36세 사장이 됐다. 남들은 힘들게 넘는 20년, 30년 세월의 산을 그는 불도저로 밀어버린 것이다.
MB는 Metro Businessman(대도시 기업가)이었다. 그는 아마도 이니셜에 서울시장을 멋지게 해낼 숙명을 타고났는지 모른다. 국회의원 박탈의 악몽도, 워싱턴에서 낚았던 세월도 청계천 물살에 다 떠내려갔다. 청계천에 물이 흐르자 그는 단숨에 고건과 박근혜를 제쳤다. 그는 메트로 대중교통 시스템도 멋지게 바꾸어 놓았다. 이니셜에 M자가 없었으면 어찌할 뻔했을까.
MB는 결국 Master of the Blue House(청와대의 주인)가 됐다. 이니셜에 숨은 코드 중에서 MB는 이것을 가장 좋아할지 모르겠다. 대선 가도에서 MB는 운이 좋았다. 자녀 위장전입 등 MB에게는 악재가 이어졌다. 그때 아프간 인질사태가 터졌다. 세인의 관심은 흩어졌고 MB는 수렁의 세월을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러나 MB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있는 바코드는 Moral Burden(도덕적 채무)이다. 선거법 위반, 위장전입, BBK 등 MB는 국민에게 도덕적 빚을 지고 있다. 국민은 그를 대통령으로 뽑아주었지만 부채까지 탕감해 준 것은 아니다. 대통령에게 그런 문제가 있으니 국정운영에 있어 더욱 더 도덕을 중시하라는 게 국민의 뜻 아니었을까. 실용이란 다 떨어진 이념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지 도덕까지 경시하는 건 아닐 게다. 실용과 도덕은 두 날개다. 실용 없는 도덕도 곤란하지만 도덕 없는 실용은 더욱 곤란하다. 기업의 세계가 아니라 공직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MB는 경력과 재산문제에 국민이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을 내각과 청와대에 많이 넣었어야 했다.
미국산 쇠고기 불안은 진실 이상으로 부풀려졌고 사태는 필요 이상으로 확대됐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쇠고기 탓만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대통령과 정권에 불만이 쌓였기 때문일 것이다. 인수위가 이것저것 과욕을 보이고, 정권이 휴일도 없이 서두르고, 정부가 혼선을 빚은 것은 집권 초 시행착오로 국민이 이해해줄 수도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 장관·수석의 도덕적 자질에 철저하지 못한 인상을 준 것은 심각한 실수였다.
Bulldozer도, Businessman도, Master도 결국은 이 Moral Burden 앞에선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닉슨은 죽(竹)의 장막을 열어젖힐 정도로 노회한 실용주의자였다. 그러나 워터게이트라는 도덕의 파도가 그를 삼켰다. 도덕이란 장벽을 넘지 못하면 MB는 성공한 Master가 될 수 없다. 쇠고기 파동이 그걸 잘 보여주고 있다. MB는 실용과 도덕을 아우를 수 있는 인재를 널리 골라야 한다. 이니셜의 마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의 인생에 Most & Best(가장, 그리고 최고)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