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7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송희영 논설실장이 쓴 칼럼 '광우병보다 끔찍한 재앙 '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광우병 파동을 보면 솔직하지 못한 정치 지도자들의 속내가 나타났다. 거짓말과 말 바꾸기, 허풍과 선동, 둘러대기와 떠넘기기 등 추잡한 얼굴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여당이라고 다를 게 없고, 야당이라고 더 나을 것도 없다. 전직 대통령이나 현직 대통령도 솔직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주부는 '뇌 송송, 구멍 탁'을 걱정하건만, 정치인들은 분노의 화살을 피하느라 저쪽에 손가락질만 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장관들, 그리고 여당은 누구보다도 솔직해야 한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번진 판에 더 이상 둘러댈 일이 아니다. 쇠고기 수입 결정이 돌연 내려진 배경부터 설명해야 한다.

    '정상회담과 쇠고기 수입 개방은 직접 관련 없다'거나 '쇠고기와 FTA(자유무역협정)는 관련 없으므로 협정을 비준해 달라'고 해봤자 순도 100%짜리 진실도 아니고, 먹히지도 않는다. 쇠고기 개방을 하지 않고는 회담인들 제대로 될 턱이 없었고, 10년 동안 삐걱대던 두 나라 외교 관계가 회복될 턱이 없다고 털어놓아야 한다.

    정상회담 몇 시간 전에 '만찬 식탁의 건배용 깜짝 선물'로 준비했다면, 그저 귀 막고 '캠프 데이비드의 하룻밤 숙박 요금치고는 너무 비쌌다'거나 '부시 대통령에게 헌납한 선물 값을 국민 건강으로 지불해야 한다는 말이냐'는 비판을 고스란히 감수해야 한다.

    괜스레 '글로벌 동반자'나 '전략적 파트너'라는 수식어로 방미(訪美) 성과를 포장하려 들지 말라. 그보다는 국가 안보, 외교 관계를 확보하는 대가로 쇠고기 시장을 줄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한 뒤,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최종적으로는 소비자들이 사먹지 않는 길밖에 없다고 하소연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서울에 와 있는 미국인들은 이미 냉소적이다. '훨씬 나쁜 중국산 농산물은 많이 먹으면서…' '그렇다면 한우(韓牛)는 광우병 걱정이 없나…'라고 꼬집고, 미국 언론에서는 보신탕 문화까지 들추고 나섰다. 미국 행정부는 인내하는 반응이지만, 의회 쪽은 '이럴 수가?'라는 분노 일색이라고 한다.

    미국의 실무 외교관 중 일부는 한술 더 뜬다. 촛불 시위는 반미(反美) 데모이고, 한국의 반미 감정을 치료할 마지막 처방은 주한 미군을 대거 철수하는 것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고 들린다.

    이처럼 격앙된 판에서는 탁 터놓고 말하는 게 상책이다. 쇠고기와 국가 안보-외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고리이고, 미국산 쇠고기를 거부하면 FTA가 좌절될 확률이 무척 높고, 어떤 형태로든 안보 비용을 추가로 부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설명해줘야 한다.

    당연히 '또 그놈의 안보 논리고, 역겨운 주한 미군 타령이냐'라고 비아냥거릴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국내 민심 얻으려고 재협상론, 검역주권론으로 쇠고기를 막으려 들면 대미(對美)관계는 꼬일 것이다. 어차피 민심 잃은 판에 외교까지 엉키면 두 가지 모두를 잃을 게 뻔하다.
    그럴 바에야 강대국 틈에 끼여 사는 한국은 안보와 시장 개방 사이에서 덜 손해 보는 쪽을 선택해야 하는 처지라는 점을 고백하고 국민의 심판을 기다리는 편이 낫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봉하마을에서 이 정부가 허우적거리는 꼴을 즐겨서는 안 된다. 그는 쇠고기 문제를 꼬이게 해놓고 가버린 장본인이다.

    FTA 협정 체결 때 그는 부시 대통령에게 쇠고기 개방을 약속했다. 밑에서 건의했던 표현보다 강한 어투로 개방 의지를 강조하는 통에 실무자들마저 놀랐다고 한다. 이것은 그가 그만두는 날까지 미국 정부로부터 '왜 약속을 안 지키느냐'는 채근을 받는 꼬투리가 되고 말았다.

    노무현 정부는 게다가 검역 과정에서 박스 하나에서 뼈 쪼가리 한두 개 발견되면 컨테이너째로 전량 반송 조치를 내리는 강경수로 미국을 자극했다. 그것도 지난 1년 반 사이 통관-반송-수입중단을 4번이나 반복, 약을 올릴 대로 올려 놓았다.

    노 정권의 막판 몇 달 동안 통상외교의 수뇌부는 쇠고기만은 끝장내려고 애썼고, 노 전 대통령도 결심했다가 번복했다는 증언이 여럿 있다. 그렇다면 그는 자기가 저지른 일을 다음 정권에 '독약'으로 풀어놓고 가버린 셈이다.

    그런데도 자신은 국민건강을 걱정해 마지막까지 사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마치 왜적을 막은 이순신 장군이나 된 듯 뽐냈다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야당 시절 한나라당 의원들은 광우병을 걱정했었고, 민주당 의원들은 '뭘 그런 걱정까지…'라는 태도였다. 지금은 공격-방어의 반대 진용에서 국민건강을 걱정하는 척하거나, 협상실패를 몰아세우고 있다. 어쩌면 광우병보다 이런 정치 지도자들이 국민에게는 더 끔찍한 재앙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