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2일자 오피니언면에 '시론'에 소설가 복거일씨가 쓴 '신데렐라 박근혜와 계모'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총선거가 치러진 날 밤 많은 시민들은 시적 정의(poetic justice)를 만끽했을 것이다. 상황에 걸맞은 방식으로 악행이 벌 받고 선행이 보답받으면, 사람은 시적 정의를 느낀다. 이번엔 시민들 스스로 시적 정의를 연출했으니, 카타르시스가 더욱 컸을 터이다.

    "몇이 나간다고 당이 망하지 않는다"던 사람들은 선거에서 우수수 떨어졌고 "살아서 돌아오라"는 비통한 얘기를 '주군'에게서 듣고 떠난 사람들은 많이 살아서 돌아왔다. 이보다 상황에 더 걸맞은 결말이 어디 있겠는가?

    자신들의 생각을 또렷이 드러내려고, 시민들은 공천에 간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들까지 낙선시켰다. 그리고 지역 선거에서 한나라당에 과반 의석을 준 시민들이 정당 투표에선 친박연대라는 야릇한 이름을 단 정당에 호의를 보였다.

    이 멋진 이야기의 주인공은 물론 박근혜 의원이다. 그녀는 신데렐라다. 그런 배역이 그녀가 지닌 엄청난 영향력의 원천이다.

    신데렐라 이야기의 핵심적 요소들은 셋이다. 하나는 젊음과 미모 때문에 계모에게서 구박받는 처녀다. 또 하나는 그녀를 돕는 요정들이다. 셋째 요소는 그녀와 사랑에 빠져서 결혼하는 왕자다. 개인적 비극이 쓸쓸한 후광처럼 어리는 박 의원에겐 구박받는 처녀 역이 자연스럽다. 열정적 지지자들은 요정들처럼 그녀를 돕는다. 그녀를 구해줄 왕자는 언젠가는 그녀를 대통령으로 고를 시민들이다.

    그러나 신데렐라 이야기를 그리도 사실적이고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악한 노릇을 하는 계모다. 신데렐라는 실은 계모가 만든다. 신데렐라는 '부엌에서 재를 뒤집어쓰고 일하는 계집애'라는 뜻이다. 우리말로는 '부엌데기'다. 누구도 신데렐라가 되기를 바라지 않고 스스로 될 수도 없다.

    안타깝게도, 박 의원의 신데렐라 이야기에서 계모 역은 어느 사이엔가 이 대통령의 몫이 되었다. 적어도 시민들 대부분이 그렇게 인식한다. 그런 인식은 근거가 없지 않다.

    한나라당에 대해 무슨 권리를 내세울 만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박 의원이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의 역풍으로 당이 좌초했을 때, 그녀는 혼자 힘으로 배를 다시 띄웠다. 그녀가 없었다면, 지금의 여당도 없었다는 얘기는 그리 큰 과장이 아니다. 반면에, 이 대통령은 당의 생존에 보탠 것이 적은 국외자였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국외자라고 느끼는 듯하고, 어쩌면 그런 느낌이 공천 과정을 통해서 여당을 단숨에 장악하려는 시도를 낳았는지도 모른다.

    이 대통령이 신데렐라를 구박하는 계모와 같다는 시민들의 인식은 그의 지도력에 대한 근본적 위험이다.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그의 도덕성이 낮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으므로, 상속녀를 구박하는 계모라는 배역은 그의 도덕적 권위를 깊이 부식할 것이다. 도덕적 권위를 잃은 지도자의 무력함은 노 대통령이 아프도록 선연하게 보여주었다.

    요정 이야기에서 악한 역을 맡는 것은 지도자에겐 보기보다 훨씬 위험하다. 요정 이야기는 삶의 근본적 조건들을 다루고 사람의 원초적 감정들에 호소한다. 원래 고대 중국에서 나와 온 세계로 퍼졌다는 사실이 말해주듯, 신데렐라 이야기는 호소력이 유난히 크다.

    이번 선거에서 이 대통령은 많이 잃었다. 자신의 뜻을 집행할 막료들이 여럿 낙선했고, 여당을 장악하는 데도 실패했다. 대통령 선거의 주요 위임사항(mandate)인 한반도 대운하를 추진할 사회적 의지도 사라졌다. 가장 아픈 손실은 물론 그의 도덕적 권위에 큰 흠집이 난 것이다. 신데렐라의 입에서 "속았다"는 말이 나온 순간, 대통령의 도덕적 권위엔 가릴 수 없는 흠집이 났다.

    이런 손실은 모두 의붓딸이 잃은 유리 구두를 자기가 낳은 딸에게 억지로 신기려는 욕심에서 비롯했다. 이 대통령은 계모의 배역에서 빨리 벗어날 길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