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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식 정치부 차장 경계선 위의 박근혜
오늘의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만든 것은 8할이 선거였다. 그는 선거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자산을 키워왔다. 지난 4년간 이어져 온 한나라당의 선거 연승(連勝) 신화는 대부분 박 전 대표의 손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발은 2004년 17대 총선이었다. 두 번의 대선 패배와 2002년 대선자금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차떼기' 의혹, 그리고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 가결 이후 닥친 역풍까지 겹치면서 당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한나라당 대표를 맡은 박 전 대표는 선거의 판도를 바꿔 놓았다. 열린우리당에 과반 의석을 허용하긴 했지만, 한나라당은 299석 중 50석 전후라는 당초 전망을 두 배 이상 뛰어넘는 121석을 얻었다. 당 대표를 맡은 지 23일만에, 천막당사에서 치른 총선에서 일궈낸 일대 반전이었다. 이것이 박 전 대표 개인의 힘만으로 이뤄졌다고 하긴 어렵지만 한나라당 부활의 중심에 그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후 박 전 대표는 정치적 위기를 겪을 때면 선거를 통해 이를 극복하곤 했다. 잇단 재·보선과 2006년 5월의 지방선거까지 그가 이끄는 한나라당이 연승 기록을 이어가면서, '박근혜'라는 이름은 선거 필승(必勝) 공식처럼 받아들여졌다.
9일 끝난 18대 총선에서 그는 예전과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 다른 정치인들이 시샘하는 규모의 청중을 몰고 다니면서 유세 현장을 누비는 대신, 이번에는 대구에 '칩거'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가치를 느끼도록 했다. 선거 현장에 부재(不在)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갈증을 키웠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번 총선에서 '박근혜'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그의 이름을 마케팅하는 경쟁이 벌어졌을 정도다. '친박(親朴)연대'라는 기이한 이름의 정당에 이어 '친박 무소속 연대'가 등장해 판을 흔들었다. 이들은 한나라당 밖에서 '친박'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국회 교섭단체(20석) 구성이 가능할 정도다. 그러나 정작 박 전 대표는 이번 총선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했다. 정상적인 정당 정치가 이뤄지는 나라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구보다 박 전 대표가 이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상황을 방관하거나 묵인했고, 당 밖의 친박 후보들에게 "살아서 돌아오라"고도 했다. 그는 한나라당과 그 바깥의 경계에 서 있었던 것이다. 한 발만 더 내디디면 박 전 대표와 한나라당의 인연도 일단 끊어지게 된다.
그는 이번 총선에서 자신이 취한 태도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다. 다만 인간적 분노와 배신감을 드러냈을 뿐이다. 천막당사 시절 기자는 한나라당 취재팀장이었다. 지금은 친이(親李·친 이명박)의 핵심 인물로 행세하는 사람들이 4년 전 총선에선 "박근혜 좀 내 지역구에 보내 달라"고 소리소리 지르던 장면을 여러 번 목격했다. 박 전 대표로서는 그런 사람들이 앞장서서 자신을 압박하는 데 대해 배신과 환멸을 느꼈을 수 있다. 그러나 국가 지도자급에 이른 사람의 공적인 결정이 언제까지나 개인적 감정에 휘둘려서는 곤란하다.
요란했던 총선도 이제 끝났다. 총선 이후 정국의 최대 변수는 박 전 대표이다.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한나라당은 물론 출범한 지 50일이 채 안 된 이명박 정부, 더 나아가 보수 진영의 판도까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총선 직전 불거졌던 보수 내전(內戰)이 계속될 것인지, 아니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 이어 국회까지 다수 세력을 차지한 보수의 전성시대가 개막될지 여부는 '박근혜 변수'라는 1차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 전 대표, 한나라당이 풀어야 할 숙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