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3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창균 정치부 차장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사람들 마음속에 내장된 시계는 저마다의 심리 상태에 따라 다른 속도로 간다. 같은 20대 청년이라도 학창 시절을 즐기는 대학생과 제대 날짜만 기다리는 사병의 시간 감각은 같을 수 없다. 한 직장 안에서도 까탈스러운 상사 밑에서 마음고생하는 직원과 해외연수 나가 있는 직원의 달력 넘기는 심사는 딴판이다.

    노무현 정권의 5년 임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번 대선 때 이명박 당선자 또는 이회창 무소속 후보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가 3분의 2 가량이다. 이들에게 지난 5년은 여느 10년보다 길게 느껴졌다. 노 정권 출범 직후부터 “겨우 한 달이 지났는데, 반년도 더 된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는 사람들이 있었다. 작년 3월 초에 ‘노 정권 임기가 1년 정도 남았다’는 글을 썼더니 “왜 한 달을 덧붙이느냐…”라는 항의성 메일을 보내온 독자도 있었다.

    5년 세월에 지친 건 반노 진영뿐이 아니었다. 노 대통령은 지난주 이명박 당선자를 만난 자리에서 “5년이 좀 길게 느껴졌다. 중간에 다시 가다듬고 출발할 수 있는 계기가 없으면 5년은 지루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임기를 1년 이상 남긴 시점부터 지지율이 10%대까지 떨어졌다. 한두 군데 조사에선 한 자릿수 지지율까지 나왔다. 노 대통령 스스로 “내 지지율이 낮으니 좋은 정책까지 거부당한다”고 탄식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임기 5년 채우기가 버거웠을 만도 하다.

    따지고 보면 노 대통령만 겪은 일도 아니었다. 정권 초 90%까지 치솟았던 김영삼 대통령 지지율은 임기 마지막 해 아들 현철씨가 구속되는 사태를 맞으며 10% 선까지 떨어졌다. 당시 김 대통령은 측근들에게 ‘그만 물러나고 싶다’는 심정을 털어놓았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김대중 대통령 역시 임기 마지막 해 홍업, 홍걸씨 두 아들을 감옥에 보낸 뒤부터 깊은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정통성 콤플렉스가 있었던 군사정권들과 달리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요란한 팡파르를 울리며 등장하곤 했다. 저마다 ‘최초의 문민정부’, ‘50년 만의 정권교체’, ‘1987년 체제의 완성’ 같은 화려한 슬로건을 내걸었다. 새로운 집권세력은 어김없이 ‘대한민국 현대사가 우리로부터 새로 시작된다’는 설교를 늘어놓았다. 자신들만이 ‘하늘이 내린 세력’인 양 행세했다. 그런 오만으로부터 국민과 정권의 불화가 시작됐고, 정권 스스로 5년 임기를 감당하지 못하는 불행으로 이어졌다.

    대통령 당선자는 책임질 일은 없으면서도, 대통령보다 더 힘이 세다. 정권 핵심세력에게 가장 행복한 때가 당선자 시절이다. 신(新)실세들의 ‘점령군 증후군’이 도지는 것도 이 무렵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 당선자 측근들에게선 아직 이런 증상이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당선자가 선거 직후부터 ‘몸 낮추기’를 강조한 덕인지도 모르겠다.

    이 당선자는 지난달 27일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서 당선 인사말을 하면서 “5년이 금방 간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괜히 폼 잡다가 망치지 않도록 하겠다”고 했다. 정치적 수사(修辭)에 능하지 못한 편이라서 신문 제목 뽑는 사람들을 늘 고민하게 만드는 이 당선자로선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한 어록이었다. 이 당선자가 이왕이면 측근들을 모아 놓고 “5년 금방 간다. 폼 잡지 말자”고 다짐시켰으면 좋겠다.

    ‘이명박 5년’이 평가받게 될 날은 어김없이 다가오게 돼 있다. 거창한 목표를 그리다 보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무리한 스윙이 나오게 마련이다. 정권이 국민을 불편하게 하지 않고, 그래서 2012년 연말 “5년이 문득 지나갔다”고 느끼게 해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성공한 정권이다. “5년 금방 간다. 폼 잡지 말자”는 다짐이 좋은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