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1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창균 정치부 차장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BBK 의혹의 핵심 인물인 김경준씨가 귀국하면서 대선판이 어수선해졌다. 이회창 후보의 출마까지 맞물리면서 단순했던 구도가 복잡 미묘해졌다. 이번만은 반드시 정권 교체를 이뤄야 한다며 목을 빼고 대선날을 기다렸던 우파(右派) 쪽에선 초조한 반응이 느껴진다. 그러면서 곁들여지는 것이 대한민국 선거 수준에 대한 탄식이다. “유권자들이 김경준이라는 사기꾼 입만 쳐다보고 있다”며 민도(民度)를 탓하기도 한다.

    BBK가 대선의 최대 변수로 떠오른 것은 사실이다. 그 진상(眞相)이 어떻게 드러나느냐에 따라 판도가 뒤바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김경준이라는 40대 초반 남자의 세 치 혀가 차기 대한민국 대통령을 결정한다는 주장은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다.

    한국 대선에 대한 자조(自嘲)섞인 한탄은 영어 표현을 빌리자면 ‘박식한 사람’(pundit)들 쪽에서 주로 나온다. 올 12월 대선에서 한 표를 행사할 3700만 유권자들의 정치 의식을 내려다보면서 ‘어리석은 대중의 빗나간 선택’ 가능성을 걱정한다.

    모든 유권자가 나라 장래를 진지하게 걱정하며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선택행위를 패션으로 여기는지 유행 따라 표를 던지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한쪽 진영에 이런 ‘무책임한 표’가 얹힌다면 그 반대편에도 ‘묻지마 표’가 보태지는 법이다. 그렇게 상쇄되면서 종합된 유권자 전체의 표심(票心)은 그 시대 대한민국의 선택이 되는 것이다.

    2007년 대선이 ‘김경준 바이러스’에 감염될까봐 우려하는 사람들은 “2002년 대선도 ‘김대업 병리현상’을 앓지 않았느냐”고 근거를 댄다. 5년 전 대선에서 병풍(兵風)이 주요 변수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김대업이라는 ‘병역 비리 전과자’ 한 사람의 활약에 의한 것이라고 몰아가는 것은 당시 유권자 전체의 선택을 평가절하하는 일이다. 병풍이 먹혀든 것은 이회창 후보의 두 아들이 ‘체중 미달’이라는 예외적인 케이스로 병역을 면제받았다는 사실(事實)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끊임없이 떠올리도록 하는데 ‘김대업효과’가 한몫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정몽준 두 사람의 ‘단일화 깜짝쇼’가 승부를 갈랐다는 점을 한국 대선판 평가의 또 다른 근거로 제시하는 사람도 있다. 맞는 말이다. 단일화가 없었다면 노무현 대통령은 없었다. 그러나 단일화 한 방이 파괴력을 갖도록 당시 대선판 밑그림이 짜여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도 안 된다. 조선일보는 2002년 대선 직후 20·30대 유권자들이 왜 노무현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심층 취재를 했다. 과학적으로 표본을 추출한 것은 아니지만 수백 명의 젊은 유권자들을 상대로 자신의 선택 이유를 물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30대 이하 유권자들 사이에 반(反)이회창 정서가 두껍게 형성돼 있었다는 점이다. 이 후보가 3자구도에서 선두를 달리면서도 마의 40% 벽을 넘어서지 못한 이유도 거기 있었던 것이다. 그 같은 반창(反昌) 정서가 있었기 때문에 정몽준 지지자 대부분이 노무현 후보 쪽으로 건너가면서 승패가 갈린 것이다.

    대선 결과를 미리 점치기는 힘들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거 후 복기(復棋)해 보면 결국 ‘될 사람이 됐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지난 5년간 노무현 대통령은 대다수 국민을 실망시켰지만 2002년 대선 당시 시대 상황은 노무현 후보를 선택하게끔 돼 있었다.

    지금 유권자들은 김경준씨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러나 유권자들의 최종 선택은 김씨 말뿐 아니라 김씨 말을 받아들일 만한지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결정될 것이다. 적어도 3700만 전체 유권자의 표심은 그렇게 나타날 것으로 믿는다. 그렇게 믿는 것이 대선 결과를 기다리는 각자의 정신 건강에도 이로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