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0일자 오피니언면 '태평로'에 이 신문 이선민 논설위원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이회창씨가 대선에 출마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물론 본인이 대통령이 되고 싶어서다. 그러나 그의 열망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기댈 언덕이 없으면 그런 결정을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회창씨가 굳게 믿는 것은 이명박씨에게 불만을 느끼는 ‘정통 우파(보수)’다. 이회창씨가 출마 선언을 하기도 전에 20%를 넘나드는 지지를 받은 것은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에 대한 정통 우파의 이반(離反)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정통 우파의 이런 정서를 반영하듯 이회창씨의 출마 선언 후 이를 일리가 있다고 보는 글들이 심심치 않게 언론 기고에 등장했다. 50대 정통 우파 논객은 “이명박 후보의 ‘중도(中道) 정치론’이 한나라당 고정표를 잃어버리게 했다”고 했다. 70대 정치학자는 “이명박 후보가 반성하지 않으면 이번 대선은 ‘모호’한 보수와 확실한 정통 보수로 나뉘어 대결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대한민국의 성공 역사를 만들어온 정통 우파는 지난 10년 사방에서 공격을 받았다. 정권을 잡은 좌파들은 광복 이후 우리 사회를 좌우해온 정통 우파가 만악(萬惡)의 근원인 양 비난했다. 우파 내에서도 새로 등장한 일부 세력은 이들을 ‘올드라이트’라 부르며 깎아 내렸다. 건국과 산업화의 주역이라는 자부심이 강한 정통 우파에게는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절치부심하며 이번 대선을 기다려온 정통 우파로서는 이명박씨가 분명한 우파 정체성을 보이지 않고 ‘경제’ ‘개혁’ ‘중도’의 이미지를 앞세우는 것이 못마땅했다. 한나라당 경선에서 박근혜씨를 지지했던 이들은 경선이 끝난 뒤에도 승자인 이명박씨에게 마음을 줄 수 없었다. 그 공백을 이회창씨가 파고들었다. 이회창씨가 “이명박 후보의 대북정책은 원칙과 철학이 없다”고 공격하는 것은 정통 우파에 대한 구애다.

    한나라당의 ‘집토끼’인 정통 우파의 동요는 대선을 앞둔 우파 진영의 큰 고민이다. 한나라당이 이들을 잡기 위해 우(右)선회하자니, 유권자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중도층의 지지를 잃을까 걱정이 된다. 그렇다고 이들을 이회창씨가 차지하도록 방치하면 좌파가 단일후보를 낼 경우 어부지리를 얻을 수도 있다. 선거일은 다가오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일각에서는 지금의 우파 내전(內戰)을 ‘안보형 보수’와 ‘경제형 보수’의 대립으로 규정한다. 정통 우파는 안보, 이명박씨는 경제를 중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현상에 대한 설명일 뿐이다. 한국 우파 운동의 과제는 이제 안보와 경제를 지나 ‘선진화’ 단계로 접어들었다. 안보와 경제는 한반도를 미국이나 영국, 일본 같은 선진사회로 만드는 전략과 전술 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 “안보가 먼저냐, 경제가 먼저냐” 같은 논쟁을 벌이느라 시간과 힘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

    이번 대선의 결과는 상당 부분 정통 우파의 선택에 달렸다. 우파 운동의 바통을 이어받은 후배들이 한국 사회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릴 수 있도록 대동단결해 밀어주느냐, 아니면 그들이 지금 느끼는 불만과 불안을 끝까지 밀고 나가 독자적인 길을 걷느냐가 후보들의 최종 승부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한국 우파의 정체성은 대한민국 역사에 대한 자부심, 미래 한국에 대한 사명감, 북한 동포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다. 이것만 확실하다면 나머지는 모두 방법론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10년 만에 찾아온 정권 탈환의 기회를 불확실하게 만들 만큼 우파 내의 차이가 커 보이지는 않는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 했다. 정통 우파는 과연 자신이 묶은 매듭을 풀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