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18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객원 대기자인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가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4분의 3세기를 살아왔다. 단순히 오랜 세월만이 아니라 그사이 많은 ‘시대’도 살아왔다. 일제 시대, 미군정 시대, 대한민국 건국 시대, 남침전쟁과 ‘인공’ 시대, 자유당 시대, 민주당 시대, 박정희 대통령과 유신 시대, 전-노 신군부 시대, 김영삼-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시대뿐만 아니라 우리는 4분의 3세기 동안 많은 ‘세계’도 체험해 왔다. 광복 후 지난 세기말까지의 오랫동안 우리는 틀림없이 ‘제3세계’에서 살아왔다. 한반도의 북쪽은 탈냉전 시대의 오늘날 희소가치가 높아진 ‘제2세계’의 마지막 유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한반도의 남쪽도 6·25 남침전쟁 중 잠시 제2세계의 실상을 체험해 봤다. 세계 10위권의 무역 대국으로 부상해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한반도 남쪽은 이미 ‘제1세계’에 속한다 해서 토를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바로 그렇기에 오늘의 한반도 남북을 자세히 살펴보면 역사와 현대사의 뭇 자료들이 생생하게 쌓여 있음을 깨닫게 된다.

    가령 봉건 왕조 시대에 아비가 자식에게 권력을 넘겨주면 많은 똑똑한 신하가 그 자식을 두말 않고 다시 섬기는 권력 세습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이들에겐 아마도 오늘의 한반도 북녘이 좋은 공부 자료가 될 것이다.

    북 미화하는 선전의 위력

    1945년의 패전까지 사람의 자식을 ‘현인신(現人神)’이라 믿고 그의 탄생일을 ‘천장절(天長節)’이라 일컬으며 그를 거론할 때마다 반드시 자세를 “차려!”로 고쳐 잡고 삼가 말을 시작했던 일제의 ‘덴노(天皇)’제가 어떻게 20세기 문명 시대에 가능했는지 궁금해하는 이도 많을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도 ‘태양절’을 섬기고 위대한 수령을 거론할 때는 반드시 기립해서 입을 여는 한반도 북쪽은 이해를 돕는 보조 자료가 될 것이다.

    도대체 오늘의 한반도 북쪽을 이해하는 데엔 태평양 전쟁 말기의 일본처럼 훌륭한 참고 자료는 없을 듯싶다. 맨발로 학교 다니고 꿀꿀이죽으로 고픈 배를 채우면서도 ‘승리의 그날까지는 아무것도 원치 않겠어요’란 표어를 되뇌며 오직 ‘귀축(鬼畜)’ 미 제국주의 타도에 충성심을 다하겠다고 맹세한 일본 군국주의. 그런 것이 20세기의 대명천지엔 있을 수도 없고 어쩌다 한 번쯤 있었다 해도 다시는 있을 수 없겠다고 생각하는 이에게도 오늘의 한반도 북쪽은 새로운 연구 대상이 될 것이다.

    좀 더 보편적인 주제로서는 20세기의 정치, 사회, 심리 현상으로 오랫동안 널리 깊이 연구됐던 ‘선전’의 문제가 있다. 예컨대 선전과 현실의 괴리, ‘선전의 위력’과 ‘이성의 무력’ 등의 문제다. 도대체 선전은 어디까지 현실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일까. 그처럼 지적 관심을 부추기는 흥미로운 주제의 새로운 접근을 위해서도 한반도 북쪽은 풍부한 분석 자료를 대 주고 있다. 민주주의와는 담을 쌓고 인민은 굶주리고 권력은 김씨 가문이 세습하는 체제를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 믿게 하는 선전의 위력!

    더 흥미로운 것은 이런 문제를 고찰하는 데엔 비단 한반도의 북쪽만이 아니라 남쪽도 근년에는 적지 않은 자료 제공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남쪽의 젊은이들이 세계화 개방화 시대에 살면서도 민주주의는 냄새도 맡지 못하고 해외여행은커녕 국내 이주의 자유조차 없는 북녘의 동포와 마찬가지로 김씨 세습왕조를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 믿고 있는 선전의 위력과 이성의 무력!

    친북 좌파의 역사 건망증

    그뿐만 아니다. 선군정치를 사방을 향해 공표하고 미사일을 쏘아 올리며 핵폭탄 실험을 하면서 막강 병력을 휴전선에 전진배치하고 있는 북녘을 ‘평화’세력이라 믿고 그들을 섬기는 것이 한반도 평화를 위하는 길이라 나도 믿고 너도 믿으라는 남쪽의 이른바 친북 좌파. 그들은 1950년 6·25 남침의 직전까지도 북쪽에서는 최신예 전차부대 앞에 ‘평화 통일’ 구호를 내세웠던 사실을 까먹어 버리고 있다.

    이 점에선 ‘역사는 반복한다’는 자못 철학적인 문제, 또는 ‘역사의 건망증’이라는 조금은 병리학적인 문제의 성찰에도 한반도의 북쪽과 남쪽은 꽤 좋은 생각거리를 대 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