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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7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양상훈 논설위원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대통합민주신당 한명숙 의원은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일찌감치 꿈을 접었지만 그가 한 한마디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한 의원은 한 달쯤 전 순회연설회에서 “국민은 이제 갈등을 유발하는 전투적 모드가 아닌, 편안한 대통령을 원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여권 의원이 한 게 맞는가 싶은 말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5년을 보내고 난 뒤 한 의원의 이 말을 들으니 우리가 가지지 못했던 지도자의 넉넉한 모습이 새삼 절실해집니다. 사람들은 지금 국민을 편안하게 해주는 대통령이 나오기를 기원(祈願)이라도 하는 심정일 것입니다.
이제 새 대통령이 다시 5년간 하루가 멀다 하고 “나는 잘났고 너는 못났다”면서 여기저기서 물고 할퀴고 싸움판을 벌여댄다면 국민은 더는 견디지 못할 것 같습니다. 사람만 못 견디는 것이 아니라 나라가 시달리다 못해 주저앉을 것만 같습니다.
나랏일이 만사 편안하게만 갈 수는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누구에게 득이 되면 누구에게는 부담이 되는 일도 많고, 대통령이 때로는 욕을 먹으면서 해야만 하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대통령이 모두를 편안하게 해준다는 것은 기만(欺瞞)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5년간 어쩔 수 없는 이해의 충돌 때문이 아니라, “나만 옳고 너는 그르다”는 대통령의 독선 때문에 이유 없는 갈등을 더 많이 안고 살았습니다. 국민은 힘들고 공무원이 편안했습니다. 이제 너무 피곤하다는 것이 사람들의 심정이고, 이것이 여권(與圈) 추락의 근본 원인 중 하나일 것입니다.
“그 사람만은 옳다”고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지도자는 차라리 위대한 철인(哲人)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철인은 수백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번 대통령 후보들 중에 그런 철인이 없다는 것도 압니다. 이제 국민의 키 높이는 선진국 수준으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쓸데없는 분란을 일으켜 사람들 괴롭히지 않고, 그저 좋은 울타리 정도만 돼 주면 우리나라는 잘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북한 핵을 비롯한 숱한 안보 문제에 부닥쳐 있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일의 시작은 국민의 단합입니다. 지금 대통령은 그 단합을 앞장서서 깨뜨리고 우리끼리 분란을 만들고 있습니다. 취임도 하기 전에 멀쩡한 한미연합사 해체를 주장하고, 북한 핵도 일리가 있다고 하고, 이제는 서해 북방한계선에 돌을 던지고 있습니다. 국민은 대통령이 안보 문제를 기발하게 처리해 노벨상을 받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안보는 대통령에게 맡기면 안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국민은 편안합니다. 이 이상 가는 안보의 기초도 없을 것입니다.
기업이 대통령 눈치 안 보게 되고, 국민이 대통령 신경 안 쓰게 되면 경제는 잘 됩니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경제는 안 됩니다. 이제 누구도 시장(市場)을 이길 수 없을 정도로 우리 경제 규모가 커졌습니다. 서민을 위한다고 떠드는 정권일수록 서민을 어렵게 만드는 이유는 대통령이 시장과 싸우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많이 올라 간 것은 국민들 벌이가 아니라 집값이었습니다. 이제 대통령은 그저 국민들이 편안하게 일하고 연구하고 돈 벌 수 있게 해주면 족합니다. 사실 그 이상 가는 경제 정책도 없습니다.
국민은 대통령의 폭언과 막말엔 정말 질렸습니다. 개인적인 한(恨)이나 피해의식을 받아주는 데도 지쳤습니다. 대통령이 국민에게 한심하다는 식의 모욕과 비난을 이렇게 퍼부은 나라가 어디 또 있겠습니까. 이만큼 당했으면 이제 좀 편안한 대통령이 나와줄 때도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노 대통령이 최근 한 인터뷰에서 “다음 대통령은 좀 부드러운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앞으로 우리 정치 풍토를 봤을 때 좀 부드러운 지도자가 대화를 잘 해서…”라고 말한 것을 보았습니다. 노 대통령도 임기 말에 깨달은 것이 있었나 봅니다. “잘나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안 싸우는 편안한 대통령을 주시옵소서.”― 2007년에 이뤄졌으면 하는 소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