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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5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선우정 도쿄특파원이 쓴 '정치는 분배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한국이 일본에 품고 있는 콤플렉스가 있다면, ‘일본이 더 풍요롭다’는 경제 문제다.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은 여전히 한국의 두 배가 넘는다. 하지만 일본을 10개 지역별로 바라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국의 1인당 소득을 일본 돈으로 환산하면 220만 엔 정도. 한국에서 가까운 규슈는 330만 엔, 오키나와는 280만 엔이다. 이들과 비교하면 일본이 한국보다 썩 잘사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잘사는 건 도쿄다. 도쿄의 1인당 소득은 600만 엔 수준으로 규슈와 오키나와의 두 배에 달한다. 일본 10개 지역 중 5개 지역이 비슷한 수준이다. 거꾸로 말하면, 소득으로 줄을 세울 때 일본의 절반이 도쿄보다 한국 쪽에 더 가까이 있는 것이다.
이런 엉뚱한 비교를 한 것은 “일본은 고루 잘사는 나라”라는 일반적 평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최근 호경기에서도 경제가 성장하는 곳은 도쿄, 나고야 등 상공업 중심부에 국한돼 있다. 정체하거나 퇴보하는 곳도 많다. 따라서 2000년대 이후 지역 격차는 더 벌어졌다. 성장할수록 격차는 심해졌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원인은 일본 정부, 즉 자민당의 정책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갑자기 돌아선 탓이다. 자민당은 두말할 필요 없는 우파다. 하지만 나라 살림을 들여다보면 얼마 전까지 확실한 좌파였다. 1990년대 이후 자민당이 복지비 지출, 공공사업을 통해 늘려놓은 나랏빚은 천문학적 규모다. 불황기였던 15년 동안 3.8배를 늘려 1000조 엔을 넘겼다. 경제 규모를 감안한 나랏빚의 수준을 생각하면 “최악의 포퓰리즘”이라고 비판받을 만하다.
덕분에 자민당은 장기 불황에서도 권력을 유지하는 이례적인 기록을 남겼다. 정치 관점에선 1993년 잠깐 정권을 내놓은 것을 “55년 체제 붕괴”라며 사건 취급하지만, 경제 관점에선 반대다. 공고해 보이던 1980년대 미국 공화당도, 영구 권력을 꿈꾸던 1990년대 한국 보수정당도 불황과 경제위기를 만났을 때 속절없이 무너졌다. 자민당만 예외였던 것은 국민들의 묵인 속에 나랏빚으로 빈부격차를 방어했기 때문이다.
지금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호황에도 불구하고 위기에 몰린 이유는 정반대다. 일본 정부가 천문학적 부채론 나라가 파산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식하고 행동에 들어간 것은 2000년대 초반이었다. 복지비, 지방보조금, 공공사업비를 줄였다. 재정 운용의 방향도 우파 노선을 택한 것이다. 정책 결정 당시엔 조용했다. 하지만 최근 지역 간 빈부격차로 고통이 다가오자 요동치기 시작했다. 자민당의 지지 기반인 지방이 등을 돌린 것이다.
‘국민이 현명하다’는 것은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 나라 살림을 생각해 격차를 인내해 달라는 아베 정부의 요구는 복지 천국을 주장하는 야당의 구호 앞에서 철저히 묻혀 버렸다. 하지만 경제는 성장한다는데 제 호주머니는 비어 가는 현실 앞에서 세상을 탓하지 않을 국민은 어디에도 없다. 일본 아베 정권의 위기는 국민 탓이 아니라 결국 ‘분배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자체 결함’의 결과물이다.
한국 보수도 마찬가지다. 빈부격차 문제에선 언제나 새 옷으로 갈아입고 공격 대형을 갖추는 상대의 속성을 2002년 이미 체험했다. 그들이 또다시 현란한 수식어로 계층 갈등을 조장하면서 국민들의 마음을 헤집고 들어올 때 한국 보수는 국민들을 설득할 어떤 ‘분배의 비전’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이 없기 때문에 늘 조마조마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