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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대중 고문이 쓴 '야당의 일차 시험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우리는 오래 분열과 적대(敵對)의 역사를 살아왔다. 정치적 갈등과 사회적 대립이 항존(恒存)하는 시대를 겪어왔다. 서로 화해하고 통합하고 협력한 시절의 기억이 없다. 남과 북, 보수와 진보, 군부와 민주화세력, 여와 야, 권력과 언론…. 우리 사회의 여러 요소들은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고 어느 한쪽이 다른 쪽 죽이기에 골몰해온 투쟁의 역사를 자랑(?)해왔다. 4·19, 5·16, 유신, 광주, 6·10은 우리의 투쟁의 현장이었고 적대의 정점(頂點)들이었다. 노무현 정권으로 대립과 분열의 정치는 극에 달한 느낌이다.
요즘 정치권 돌아가는 꼴을 보니 2007년 이후에도 국민통합의 정치로 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 정치권은 온통 철천지원수들끼리 모인 것 같다. 이른바 검증이라는 명분으로 여야가, 또 야당끼리 치고받는 싸움에 악의와 분노, 음모와 위선, 왜곡과 거짓말들이 번뜩이고 있다. 결국 이 싸움이 일단락된 뒤 화해니 통합이니 하는 것들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고 또다시 분열과 보복과 징벌의 정치가 횡행할 것이 두렵다.
대통령으로부터 여당 의원들과 친노세력에 이르기까지 야당 후보들에 대한 공격은 점차 노골화하고 있다. 온 정치권이 ‘이·박’과 싸우는 꼴이다. 대통령이 어떤 정책의 당·부당 논쟁을 떠나 “수구·기득권세력에 표 찍지 말라”고 선동하는 상황에서 누가 이기든 선거 후 정치권의 화해와 협력은 연목구어(緣木求魚)일 뿐이다. 지난주 이명박씨가 범여권과 당내를 향해 “미쳐 날뛰고 있다”고 분노를 쏟아낼 때 사람들은 ‘어디 두고 보자’는 섬뜩함을 느꼈을 것이다.
야당 후보들끼리 하는 공방도 피아(彼我)를 구별할 수 없다. 이래 가지고는 한나라당 후보가 경선의 결과로 단일화된대도 하나로 뭉쳐 본선에 임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다. 이명박, 박근혜 캠프 쪽 사람들도 “경선 후에 패배한 후보가 이긴 후보를 위해 유세에 나서 줄지도 의문이고 각 진영의 사람들이 같이 일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 실토하고 있다. “이간질하는 사람들을 솎아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남들은 싸워도 이렇게 싸우지 않는다. 싸우는 ‘장소’와 ‘시간’을 정해서 싸우고 그것이 끝나면 곧바로 장(場)을 걷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선거도 그런 게임 중의 하나다. 감정을 주체 못해 악을 쓰거나 피 튀게 싸우면 그 사회에서 도태된다. 그들은 싸움이 도를 넘거나 링 밖으로 벗어나면 모두가 죽는다는 것을 안다. 보복하면 보복당한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안다. 서로가 보완하고 견제하며 협력하는 것은 그것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보복의 부메랑이 자신에게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한나라당부터 그 악순환의 맥을 끊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범여권은 내용이야 어떻든 ‘통합’으로 치장하고 있는데 야당이 ‘분탕’으로 가는 꼴을 보여서야 되겠는가. 두 후보가 승복의 약속을 재확인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8월 20일 이후 단일화된 후보를 위해 선거운동에 적극 나설 것을 국민 앞에 서약하는 이벤트를 마련하라는 것이다. 두 후보만 그렇게 해서는 미진하다. 두 진영의 총책임자를 비롯해 참모진까지 이런 이벤트에 참석해 당의 결정에 승복할 뿐 아니라, 선거에서 이탈하지 않고 이긴 측의 선거운동에 적극 공여할 것을 서약한다면 국민들은 신선함을 느낄 것이다. 이렇게 되면 누구의 말처럼 ‘교활하고 야비한 꾀를 내는 사람들’도 확실히 줄어들 것이고 어떤 검증문제를 제기하더라도 비방하는 식이 아닌 ‘질문하는 식’으로 절도 있게 하게 될 것이다. 여권의 공격도 빛을 잃을 것이다.
자기 소속당의 통합과 단결을 이끌어낼 수 없는 사람이라면 대통령이 됐다고 해도 국민의 통합과 상대당의 협력을 얻어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자기 진영에서부터 보복의 악순환을 끊을 능력이 없는 지도자라면 대통령이 됐다 해도 보복을 멈출 수 없고 그 자신이 또다시 보복의 대상이 될 뿐이라는 것이 ‘노무현 학습효과’의 하나다. 노 대통령은 그 자신 무슨 용을 쓰든 이제 ‘과거’에 불과하다. 새 지도자라면 거기에 매달리지 말고 미래를 얘기해야 한다. 오랜 분열과 대립과 정치적 죽이기에 시달려온 국민들은 지금 나라를 이끌어갈 정책과 세상을 보는 관(觀) 못지않게 나라를 통합하고 단결시킬 지도력을 새 대통령에게 간절히 바라고 있다. 야당의 일차 시험대는 바로 거기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