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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5일자 오피니언면 '태평로'에 이 신문 홍준호 편집부국장이 쓴 '노 대통령의 DJ 콤플렉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말년에 이르러 더 거칠어지는 노무현 대통령의 언사를 보면, 그가 상당히 화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동안 노 대통령을 화나게 한 대표선수는 하루가 멀다 하고 비판기사를 쏟아내는 기자들과, 헌법과 법의 이름으로 자신에게 경고장을 들이미는 헌법기관, ‘세계적 대통령’을 ‘무능의 대명사’로 깎아내리는 야당 정치인이다. 그러나 화나는 수준을 넘어 화를 내도 풀 수 없을 만큼 견디기 힘든 상태로까지 노 대통령을 밀어 온 사람들은 그와 한솥밥을 먹던 여권 정치인들이다.
노 대통령은 어제 “(이번 대선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를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에서 대선주자, 전직 의장, 대변인까지 다 나가도 열린우리당의 간판만큼은 지켜야 한다는 배수진을 친 것이지만, 바로 그날 열린우리당은 당 해산을 논의했다.
노 대통령은 정치로 커 온 사람이다. 다른 분야에서 모조리 낙제점을 받더라도 정치에서만큼은 A학점을 받을 것으로 자신했을 터인데, 현실은 그 반대쪽으로 굴러가고 있다. 노 대통령에게 열린우리당의 와해는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충격이다. 노 대통령에게 노무현 시대의 정치적 의미는 ‘3김 시대의 정리’였고, 열린우리당은 그 상징이었다. 그 정치적 상징이 자신의 임기 중에 정리 단계에 들어서고 그 정리 작업에 자신의 옛 동지들이 앞장서는 광경을 지켜보는 노 대통령의 심경이 어떠할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노 대통령이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은 열린우리당이 공중분해되는 과정에서 원심력을 발휘하는 인물이 DJ(김대중 전 대통령)란 점일 것이다. 3김 시대의 정리란 현실 정치에선 직전 대통령인 DJ를 극복하는 것을 뜻했는데, 바로 그 DJ의 손짓 아래 열린우리당이 정리되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열린우리당을 떠나는 사람들은 “범여권의 대통합”을 말한다. 말이 대통합이지 갈라섰던 민주당과 다시 합치자는 얘기이다. 심지어 DJ는 “민주당을 중심으로 다음 대선후보를 만드는 것이 당연하다”고까지 말한다.
노 대통령은 이같은 DJ 구상대로 가선 결코 대선에서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지역별 표 계산은 둘째 치더라도, 자신은 3김 시대 정리란 ‘포스트 DJ’의 시대적 명분을 지니고 있었던 데 비해, 뒤늦게 DJ를 졸졸 따라다니는 대선 주자들이 과연 어떤 정치적 명분을 가질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고 싶을 것이다. 자신의 집권으로 근근이 마련한 영남에서의 정치적 기반이 완전히 무너져 내릴 것이란 개인적 걱정도 할 것이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의 다수는 노 대통령의 이런 정치적 판단과 걱정에 대한 시시비비를 떠난 지 오래다. 오히려 ‘노무현 프레임’으로부터 탈출하는 것만이 그나마 살길이란 인식이 공식처럼 자리잡았다. 한때 과반의석을 차지했던 집권당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물론 노 대통령의 자업자득이다.
지난 대선 때 노 대통령의 핵심 참모를 했던 한 정치인은 노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을 창당할 때 “DJ의 서자(庶子) 노릇을 하기 싫다는 노 대통령의 심리가 큰 요인 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어쩌면 노 대통령은 지금 그동안 DJ로부터의 홀로서기를 시도했던 데 따른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열린우리당이 DJ 구상대로 풍비박산난다면 ‘노빠부대’를 양산했던 ‘노무현 정치’의 거품이 걷히면서 ‘노 대통령은 결국 DJ 세력에 얹혀 있었던 신세였구나’ 하는 세평(世評)이 번질 것이다. 노 대통령은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고 인정할 리도 없는 이런 세평이야말로 그를 더욱 인내하기 힘든 심리 상태로 내몰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DJ를 향해 대놓고 화를 내고 본격적인 전선을 만들 수도 없는 게 노 대통령의 정치적 한계이다. 임기를 마무리할 시점에 노 대통령이 천지 사방에 엉뚱한 전선을 만들고 ‘대통령의 언어’라고 할 수 없는 거리의 말들을 기관총에 쓸어 담아 난사하는 현상은 노 대통령이 처한 이런 정치적 처지를 감안하면 전혀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