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6일자 칼럼면에 이 신문 사회부문 부에디터 김종혁씨가 쓴 <'그놈의 헌법'은 수호돼야 한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정확히 20년 전인 1987년 6월 나는 길거리에 있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시위 인파에 섞여 시청 앞과 을지로, 한국은행 본점 앞 등을 아우성치며 뛰어다녔다. 당시 나는 그럴 처지는 아니었다. 운동권 학생으로 강제 징집돼 '녹화 사업(기무사의 사상 개조 작업)'을 받고 돌아온 4학년 복학생. 형편상 취직은 해야겠는데 학생운동 딱지가 붙어 있어 그런 것 안 따지는 언론사 시험을 준비하던 수험생. 그런 내가 있어야 할 곳은 길거리가 아니라 도서관이나 강의실이어야 했다.

    하지만 짬나는 대로 나갔다. 그때 모두 목쉬게 외쳤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이른바 6월 민주화 항쟁에서 우리가 원한 것은 개헌이었다. 체육관에서 치러지는 간접선거가 아닌,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도록 헌법을 바꾸라는 것이었다. 시민들이 이겼다. 군사정권이 졌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헌법이다.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은 그동안 누더기였다. 무려 여덟 차례나 개정됐다. 독재자 소리를 듣는 역대 대통령들이 제멋대로 바꿨다. 10년을 넘긴 헌법이 없었다. 87년 헌법은 달랐다. 여야가 함께 모여 밀고 당기면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함부로 개헌할 수도 없게 했다. 그 뒤 어언 20년이 흘렀다.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뿌듯하다. 자랑스러운 헌법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2일 그런 헌법을 '묵사발'로 만들었다. 무려 4시간 동안 계속된 '참여정부 평가포럼' 강연에서다.

    솔직히 무슨 종교집회를 방불케 한 그 행사에서 노 대통령이 '원맨 쇼'(민주당 유종필 대변인)를 했든 '자아도취와 과대망상의 나르시시즘'(한나라당 강재섭 대표)에 빠졌든 별 상관하고 싶지 않다. 한두 번 그런 것도 아니고, 또 그걸 볼 날도 그리 많이 남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캬, 토론하고 싶은데 그놈의 헌법에 못하게 돼 있으니…"라고 비아냥 댄 노 대통령의 발언에는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놈의 헌법'이라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고 청춘을 바치고 인생을 걸어서 쟁취해 낸 헌법인데 거기다 발길질을 해 대는가. 혹시 대통령은 취임하면서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로 시작되는 선서를 하는 '헌법의 수호자'라는 사실을 잊었는가. 아니면 헌법을 수호하기 부담스러운가. 그럼 빨리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는 게 옳다.

    기왕 말이 나왔는데 맞다, '그놈의 헌법' 때문이다. 걸핏하면 국민을 이간질하는 발언을 하고, 대통령 직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야당 대표들을 훈계하는 지지율 20%대의 대통령을 그냥 참고 넘어가는 것도 '그놈의 헌법' 탓이다 (헌법 제70조 대통령의 임기). 선거법 위반인 듯한 발언을 쏟아내도 현직 대통령에 대해선 재직 중 형사소추를 받지 않게 한 것(헌법 제84조)도 바로 '그놈의 헌법'이다. 임기가 열 달도 안 남았는데 기자실을 통폐합하겠다며 국민 세금을 맘대로 쓰는 권한을 부여한 것(헌법 제66조 제4항)도 마찬가지다. 어찌 보면 '그놈의 헌법'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 노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께 말씀드린다. '그놈의 헌법'은 수호돼야 한다고. 헌법은 역사고 국민이라고. 나에게 유리하면 삼키고 불리하면 뱉어내는 게 아니라고.

    노 대통령은 스스로 '세계적인 대통령'이라고 했다. 많은 국민, 어이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노 대통령이 민주화 투쟁을 했던 건 맞다. 87년 헌법을 쟁취하기 위해 쏟았던 고단한 노력을 노 대통령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헌법 비하 발언은 말실수였다고 믿고 싶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박수 소리에 홀리고 환호하는 청중에 도취돼 그랬다고 보고 싶다. 노 대통령이 속으로 헌법을 어떻게 생각하든 좋다. 하지만 '그놈의 헌법'은 대통령이 할 수 있는 발언이 아니다. 대통령뿐이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 된 자는 누구든 헌법을 모욕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