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7일자 오피니언면 '동서남북'에 이 신문 박두식 정치부 차장대우가 쓴 <주홍글씨 된 ‘노무현’이란 이름>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즘 열린우리당은 말 그대로 샌드위치 신세다. 열린우리당 간판으로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심지어 ‘열린우리당 사수론자’로 분류되는 노무현 대통령이나 친노(親盧) 세력도 공식 입장을 물으면, ‘질서 있는 (여권)통합’이라고 말한다. 어떤 형태로든 열린우리당이란 틀에 변화를 줘야 한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딱히 갈 곳이 없다. 오라는 데도 많지 않다. 열린우리당이 새로운 당을 만드는 과정에서 첫 번째 파트너로 꼽고 있는 민주당 쪽에선 ‘살생부(殺生簿)’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호남에 강한 지지 기반을 가진 민주당은 범여권 통합의 기축(基軸)이다. 범여권 통합에 끼어야 이번 대선은 물론 내년 총선 등 정치적 생존을 기약할 수 있다. 그런 민주당에서 살생부 얘기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 기준은 ‘노무현 대통령과의 거리’이다. ‘노무현 색깔’이 얼마나 짙은가에 따라 함께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누겠다는 얘기다. 민주당 박상천 대표는 총리나 장관 등으로 국정에 참여했거나 좌파 성향, 친노로 분류된 인사와는 함께 당을 할 수 없다고 했다. 한마디로 지난 4년간 ‘노무현류(流)의 정치에 적극 가담했던 사람’은 배제하겠다는 것이다.

    민주당 관계자는 이것을 “노무현 정권 4년에 대한 씻김굿 차원의 사전 작업”이라고 했다. “지난 3년간 민주당이 야당을 하면서 풍찬노숙했는데, 지금 와서 노무현 정권의 부채를 떠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 사람들은 연일 민주당에 대한 비난을 퍼붓고 있지만, 답답한 것은 민주당이 아니라 열린우리당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민주당이 꼽는 배제 대상에는 정동영·김근태 두 전직 당 의장, 천정배 의원, 이해찬·한명숙 전 총리 등 열린우리당에서 대선주자로 꼽히는 사람들까지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한 대선주자의 표현을 빌리면, “노무현 정부에서 일한 것을 부역(附逆)의 죄로 다루려”는 상황인 것이다. 민주당뿐만이 아니다. 곳곳에서 ‘노무현 표 정치인’으로 찍히면 환영받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바깥에서 보면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당(黨)’이다. 그런 사람들끼리 서로 반노(反盧)·비노(非盧)·친노 하는 식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 이 구분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주요한 경계선이다. ‘노무현’이란 세 글자는 이제 여권의 현역 정치인들에겐, 숨기고 싶은 ‘주홍글씨’가 된 것이다. 가슴에 새겨진 간통을 뜻하는 ‘A(adultery)’라는 글씨를 숨기려 했던 것처럼, 이젠 노 대통령과의 관계나 열린우리당 경력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고 있다. 실제 지난 4·25 재·보선에서 열린우리당 출신들이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이 같은 상황을 ‘정치인 노무현의 좌절’이라면서 “창당 정신과 역사를 지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이를 따를 정치인은 많지 않다. 한 의원은 “노 대통령은 순장(殉葬)을 각오하자고 하는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고 했다. 정치 도의나 정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노 대통령의 말이 맞다. 열린우리당 간판으로, 노무현 정권에 참여한 사람이라면 그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지는 게 옳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의 상황은 정반대로 가고 있다. 요즘 서울 여의도 국회 주변에서는 친노로 알려졌던 사람이 비노·반노로 옮겨 오는 탈노(脫盧) 현장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2002년 대선에서부터 시작된 ‘노무현식 정치 실험의 마지막 장(章)’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