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4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박두식 정당팀장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종종 전혀 다른 두 사람이 한 몸에 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대통령의 말부터가 그렇다. 어떤 때는 고집스럽게 명분과 원칙을 강조하다가, 어느 순간 “주고받는 장사꾼의 논리”를 내세운다. 화해와 통합을 이야기하면서, 한편으론 끊임없이 정적이나 비판언론을 향해 날 선 적의의 언어들을 쏟아내곤 했다.
미국 문제도 비슷하다. 그는 대통령 후보 시절 “반미면 어때”라고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취임 첫해 미국 방문에선 “(한국전쟁 때) 미국이 한국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쯤 정치범 수용소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의 지지자들조차 어리둥절해 할 만큼 변화의 폭이 컸다.
노 대통령이 1년 넘는 세월 동안 밀어붙여 성사시킨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협상도 비슷한 범주에 속한다. 자신의 지지층이 극렬 반대할 게 불을 보듯 분명하고,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한미 FTA를 하겠다고 나섰다. 당연히 “노 대통령은 왜?”라는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한동안 유행했던 것이 온갖 음모론들이다. 그중에서도 한미 FTA를 올해 대선에서 ‘좌파 진영 규합의 불쏘시개’로 삼으려 한다는 주장이 가장 널리 퍼졌었다. 어차피 한미 FTA 합의가 쉽지 않을 것인 만큼, 협상 과정에서 반미 감정이 촉발되도록 유도함으로써 2002년 대선에 이어 또 한번 ‘미국 변수’를 만들려 한다는 식의 논리다. 올해 대선이 한나라당 대선주자들의 일방적 우위, 여권의 후보 부재라는 상황으로 진행되고 있는 터라 정치권의 적잖은 사람들이 이런 주장에 솔깃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미 FTA 협상이 타결되면서 음모론도 막을 내리게 됐다.
노 대통령이 한미 FTA를 추진하면서 내세운 것이 ‘장사꾼의 논리’다. 협상 타결 직후 대국민 담화에서 “우리 경제의 미래와 중국을 비롯한 세계 시장의 변화까지 내다보는 큰 장사꾼의 안목을 가지고 협상에 임했다”고 했다. “FTA는 정치의 문제도 이념의 문제도 아니고 먹고사는 문제”인 만큼, 철저하게 장사꾼의 시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다.
이는 지난 4년간 노 대통령이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보여줬던 자세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노 대통령은 자기 앞에서 민생 문제를 꺼내는 것 자체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곤 했다. 알아서 열심히 하고 있는데 자꾸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나에 대한) 모욕”이라고도 했다.
그런 노 대통령이 한미 FTA 만큼은 ‘미래의 먹고사는 문제’로 접근했다고 밝힌 것은 반가운 반전이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인 우리의 처지와, 미래의 성장 동력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한미 FTA를 모색하게 됐다는 청와대 측의 설명이 사실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 상당수 국민들의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노 대통령의 FTA 반대 진영 비판도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한때 이들과 정치적 운명을 함께했던 노 대통령이지만, 한미 FTA 논란이 불거진 이후 개방에 반대하는 수구적 인식의 틀에 갇힌 좌파 진영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가 진보 진영만 사는 나라인가. 진보라면 미래의 문제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이 대목 역시 공감을 살만하다.
노 대통령은 얼마 전 “정치적으론 성공하지 못했지만 정책을 수행한 대통령으로 기억해달라”고 했다. 한미 FTA는 이 같은 바람이 실현될 수 있는 출발점이고, 내친 김에 국내 동의 절차까지 마무리하는 일도 그의 몫이다. 노 대통령이 남은 임기 10개월 동안 ‘먹고사는 문제가 걸린 정책’에 전념한다면 그에 대한 역사의 평가도 달라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