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29일자 오피니언면 '시시각각'에 이 신문 김종혁 사회부문 부에디터가 쓴 '평준화, 그 화려한 거짓말'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어떤 공부 잘하고 똑똑한 한국 애가 미국에 산다고 해 보자. 이 아이는 초등학교 2학년이 되면 IQ 테스트 비슷한 걸 치른다. 점수가 높으면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온다. "얘는 머리가 좋으니 GT 스쿨(Gifted Talented School)에 보내는 게 좋겠다." GT 스쿨은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 가는 공립 학교다. 부모는 "너무 멀어 다니기 힘들 텐데…"라며 망설인다. 선생님은 말한다. "그래? 그럼 학교 안에 있는 GT반에라도 보내자."

    우수한 학생들은 동네에 있는 일반 중·고등학교에 가도 상관없다. 똑같은 수학 과목도 일반·오너(honor)·AP클래스로 등급이 있으니 자기 수준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대학입시는 어떻게 할까. 각 대학은 지원자가 어떤 과목에서 몇 점을 얻었는지 따져본다. "음, 이 학생은 영어와 역사는 AP과목을 선택해 모두 5점 만점을 받았지만, 수학은 일반 클래스에서 C학점을 받았군. 하지만 문학사를 전공하겠다니까 합격시켜도 되겠다." 이런 식이다. 하버드대 의대를 지망한 교포 학생이 "당신은 봉사활동이나 헌혈 한번 안 했고, 다른 특활 활동도 없다. 우리는 그런 학생 필요 없다"는 말을 듣고 탈락했다는 전설 같은 얘기는 그래서 가능하다.

    특파원으로 워싱턴에서 몇 년 살아봤지만 미국도 문제가 많은 나라다. 하지만 미국에선 똑똑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가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잘하는 아이는 계속 잘할 수 있게 북돋아 주기 때문이다. 죽도록 과외를 받을 필요도 없다. 잘하든 못하든 자기 수준에 맞춰 수업을 선택해 들으면 된다. 선생님이나 아이들이나 두루 편하다.

    미국 학교에 다녀본 한국 아이들이 죽어도 귀국하기 싫어하는 건 애국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뭐가 좋은지는 애들도 금방 아는 것이다. 워싱턴에 있을 때 미국 교사와 한국 교육제도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모든 수준의 아이들을 한 반에 넣고 전부 똑같은 커리큘럼으로 가르치는 이른바 평준화에 대해서 말이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요?"하는 물음에 대답이 참 궁했었다.

    노무현 정부가 실패한 두 개의 대표적인 정책을 꼽으라면 교육과 부동산이다.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앞뒷면이다. 강남 집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데는 교육 문제가 크게 기여했다. 그 반대도 성립한다.

    대체 왜 이렇게 망가졌을까. 무엇보다 교육과 부동산을 그 자체로 바라보지 않고 '이념과 코드'를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건강하고 경쟁력 있는 아이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부는 교육에다 '부자와 잘난 자'에 대한 증오심을 덮어씌웠다. 부동산도 마찬가지다. 질투와 분노에 눈이 멀어 이성을 상실한 어느 비극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둘째는 위선이다. 어떤 청와대 인사는 강남에 큰 아파트 갖고 있으면서 강남에 집 사지 말라고 떠들어댔다. 자기애들은 외고 졸업시켜 놓고 '외고 망국론'을 편 교육책임자도 있다. 가끔씩 궁금하다. 입만 열면 평등과 평준화를 외치는 정치인, 그들에게 이론을 대주는 일부 학자들, 그리고 교육·부동산 정책 담당자는 자녀들을 어떻게 키웠는지, 또 어디서 사는지 말이다.

    박정희 정권을 그토록 미워하는 사람들이 박 정권이 만들었고 21세기엔 용도 폐기가 됐어야 할 평준화 제도를 결사적으로 사수하는 걸 보면 신기한 생각도 든다. 기업과 대학에 대한 규제와 간섭을 하는 것도 박 정권 때 못지않다.

    옛날엔 경북고 광주일고 부산고 경남고 대전고 전주고 등 지방 명문고가 많았다. 가난해도, 서울에 안 와도 일단 이런 데 들어가면 명문대의 희망이 보였다. 지금은 어떤가.

    평등주의자들의 화려한 레토릭에 속지 말자. 전인교육? 과목수 10개씩 만들어 애들 죽어나게 만드는 게 전인교육인가. 평준화? 그런 식으로 붕어빵 찍어내기라면 온 국민에게 기쁨을 준 수영선수 박태환, 피겨요정 김연아는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젠 제발 위선에서 벗어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