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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12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백화종 편집인이 쓴 '정계 재편과 DJ의 딜레마'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실패한 정치 실험들 중에는 지역구도 타파도 들어 있다. 민주당을 쪼개 열린우리당을 만든 것도 ‘김대중(DJ)의 호남당’을 ‘노무현의 전국정당’ 으로 탈바꿈시켜보자는 뜻이었다. 그리하여 95%의 지지율로 자신을 대통령 만들어준 호남과 정을 떼고 영남과 정을 붙이려고 무척 애썼다. “호남이 나에게 표를 준 것은 내가 좋아서라기보다 이회창 후보가 싫어서”라는 발언, 영남에 대한 인사 및 발전정책의 배려 등이 그 예다.
그러나 실패했다. 영남은, 문재인씨의 말처럼, 노 대통령이 부산 출신인데도 부산 정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호남이 만든 정권이어서 영남의 적자(嫡子)가 아니라는 인식이었을 터이다. 더욱 안 된 것은 호남마저 삐쳐버렸다는 점이다. 노 대통령의 몇몇 언행에서 “남의 자식 키워봤자”라는 섭섭함이 생겼을 터이다.
여당이 선거마다 참패하고 노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지지율이 10%대에 머무는 것도, 물론 다른 실정(失政)탓이 더 크지만, 이처럼 지역구도 타파 시도가 실패한 데도 그 한 원인이 있다. DJ의 표현대로 노 대통령은 분당으로 산토끼 잡으려다 집토끼마저 놓치고 말았다.
여당의 탈당사태도 이제 산토끼는 포기하고 놓친 집토끼나마 잡아와야겠다는 것이다. 고토회복, 즉 호남 되찾기 작전이다.
그래서 탈당 및 신당 추진이 지역구도로의 회귀라는 노 대통령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그리고 이를 막으려는 그의 노력은 가상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는다던가. 지금의 여권 새판 짜기에서는 현직 대통령보다 전직 대통령의 입김이 셀 것 같다. 노 대통령의 지역 구도를 깨려는 노력도 호남(또는 호남출신) 유권자들에 대한 DJ 영향력과 그것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정치인들 앞에서는 허사일 것 같다. 호남과 서울 등 수도권의 탈당파와 잔류파 모두 DJ에게 애타게 SOS를 보내고 있으며, 비(非)한나라당의 각 정파 간에 전개될 DJ 총애싸움은 정통성싸움으로까지 비화될 것이다.
이처럼 정계 재편에 엄청난 파괴력을 갖고 있는 전직 대통령으로서 자신이 만든 정당이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또 한나라당이 집권할 경우 필생의 신념으로 추진하여 노벨상까지 받은 대북 포용정책이 사라질 위기를 맞는데 오불관언으로 있기란 힘든 일이다. 지리멸렬하여 생존여부마저 불투명한 여권에게 힘을 합쳐 거대 야당에 대항하라고 응원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러나 DJ 앞에는 풀기 힘든 딜레마가 놓여 있다. 계속해서 호남이 아닌 국가적 지도자로 남기 위해서는 지역구도 정치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러나 대북 포용정책 등 자신의 정치이념을 유지 발전시킬 정당(여권)이 존속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원하는 바가 아니겠지만 지역구도 정치로의 회귀,직설적으로 표현하면 호남의 재결집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국가적 지도자로 남기 위해 자신의 정치 이념이 말살될 위험을 감수하고 현실 정치에서 초연할 것이냐, 아니면 자신의 정치 이념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국가가 아닌 호남의 지도자로 매도당할 각오로 현실 정치에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냐. DJ로서는 참으로 괴로운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또 솔로몬의 지혜가 요구되는 대목이다.
기자는 DJ가 유감스럽게도 둘 중 택일하는 게 피할 수 없는 잔이 된다면 후자, 즉 명예를 버리고 정치 이념을 선택할 것으로 본다. 이 같은 선택을 강요받는 게 우리 정치의 비극적 한계이고, DJ가 안고 태어난 숙명이다. DJ가, 아니 우리 정치가 이 곤혹스런 딜레마를 피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