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6일자 오피니언면에 언론인 류근일씨가 쓴 '대세론 필패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은 지금 위험한 길을 가고 있다. 오히려 범(汎)여권이 ‘위기’와 함께 ‘기회’를 맞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나라당은 ‘태평성세’를 구가하고 있는 반면에, 범여권은 ‘비장한 각오’로 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따 놓은 당상’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반면에, 범여권은 “더 나빠져 보았자 죽기밖에 더하겠느냐?”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죽을 각오를 하지 않는 자가, 죽을 각오를 한 자를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유권자들은 죽음을 각오한 ‘비장한 사람’에게서 감동을 받는 법이다. 여기에 한나라당의 치명적인 위기가 있다.

    이명박-박근혜씨가 ‘지금 이 시점’에서는 여론조사에서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월등히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금 이 시점’의 잠정적인 현상일 뿐이다. 12월 19일의 대통령 선거 때까지는 아직도 10개월이나 남아 있다.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리고 특정 후보에 대한 대중의 호불호(好不好)는 어떤 사안(事案) 하나에 후닥닥 뒤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박근혜-이명박씨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한나라당은 지금 “우리와 범여권 사이의 싸움은 이미 끝났다. 이제부터는 이명박-박근혜 사이의 싸움만 있을 뿐…”이라고 치부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헛된 꿈’이고 ‘위험한 덫’이다. 한나라당 경쟁자들이 현재의 초년 운(初年運)에 뿌듯하게 심취해 있을수록, 유권자들은 마치 ‘대통령 다 된 것 같이’ 보이는 그들의 승승장구에 어느 순간 돌연한 반발심과 ‘혼내주고 싶은’ 심정을 느낄 수도 있다. 유권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쉽게 이기려는 자세’이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을 반하게 만드는 ‘연인상(像)’은 사지(死地)에서 몸부림치는 ‘약자’이지, 양지(陽地)에서 폼 재는 ‘잘난 사람’이 아니란 이야기다.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지금 한나라당 경선주자들은 혼자 뛰어서 1등 하는 것 같은 모습이고, 범여권은 ‘만난(萬難)을 무릅쓰는’ 약자의 모습을 보이려 부심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분명히 야당이면서도 의식상으로는 이미 ‘집권 직전에 온 여당’처럼 비치는 데 반해, 범여권은 분명히 집권세력인데도 의식상으로는 마치 ‘싸우는 야당’이라도 된 것처럼 시늉하고 있으니 말이다. 한나라당은 “보수는 으레 우리 몫이니 이제는 중도를 잠식해야 한다”는 외연 확대론에 빠져 있다. 이에 비해 범여권은 “이대로 밀리면 끝장이다”라는 필사적인 위기감으로 언필칭 ‘통합’을 내세우고 있다.

    이미 배가 불러 있는 사람의 특징은 ‘싸우지 않는 것’이다. 다 이겨 놓았는데 왜 쓸데없이 적을 만들어 싸우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한나라당 사람들은 자기네 울타리 안에서만 지지고 볶고 할 뿐, 정작 대한민국 대통령 지망자가 싸워야 할 상대방이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싸워야 하는지 분명하게 인식하지 않으면서 도처에 팔방미인 같은 추파만 던지고 있다. 그들은 우파에는 “우리가 남이가…”, 중도에는 “나는 보수 아니다…”, 좌파에는 “나도 ‘햇볕’ 할 줄 안다” 하면서, “나는 이것을 추구하고, 이것을 배척하고, 이것을 위해 전사(戰死)라도 하겠다”는 투철한 신념인의 바탕을 좀처럼 내비치지 않는다.

    한나라당의 이런 처세는 정권투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들의 기본적인 인식에 중대한 오류가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정권은 자신의 신념으로 다수 국민을 감동시켜 쟁취하는 것이지, 여론조사에 얹혀 얻어지는 게 아니다. 역대의 창업자들 모두가 남의 눈치 보기보다는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 내고, 여론을 창출해 냄으로써 승리한 사람들이다. 박정희-김영삼-김대중-이병철-정주영씨가 언제 여론조사로 정치-사업 했나? ‘대세론’대로라면 ‘대통령 노무현’도 없었을 것이다. 한나라당의 ‘대세론’은 결국 자신을 잡는 덫이 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