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2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박두식 정당팀장이 쓴 '열린우리당, 간판만 내리면 끝인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열린우리당은 스스로를 유별난 존재라고 주장해온 정당이다. 2003년 11월 창당 때부터 그랬다. 열린우리당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한국 정치가 과거의 악습과 절연(絶緣)할 수 있게 됐다는 식의 주장을 폈다. 시대의 부름을 받은 ‘선택된 존재’라는 느낌을 주는 논리였다. 자신들에게 ‘민주평화개혁 세력’이란 거창한 이름을 붙인 것도 이런 심리 상태에서 비롯됐다. 2004년 4월 총선에서 국회 다수당이 되자 곧바로 100년 넘는 우리 역사에 대한 ‘과거사 청산’작업을 하겠다고 나선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우리 역사는 자신들의 집권을 기점으로 새로 시작됐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이다.

    창당으로부터 지금까지 3년2개월여 남짓한 시간 동안 열린우리당 사람들은 뭐든지 자신들은 과거와 다르다고 주장하곤 했다. 대통령과 집권당이 정책을 놓고 으르렁거려 혼란이 빚어지면 그것을 바로잡으려 하기에 앞서 ‘당·정(黨·政) 분리’라는 새로운 실험을 주목해 달라고 했다. 현 집권측에 쏟아진 ‘무능과 오만’ 심지어 ‘싸가지 없다’는 거친 비판 앞에서 입장이 군색해질 때도 그냥 물러서진 않았다. ‘과거와 다른 새로운 정치 실험의 과정에서 빚어진 시행착오’로 봐야 한다는 항변이라도 내세웠던 것이다. 

    그런 열린우리당이 요즘 슬그머니 간판을 내리려 하고 있다. 새해 들어 열린우리당에선 하루에도 이런 저런 모임이 몇 개씩 열리고 있다. 주제는 단 하나, 어떻게 당(黨)의 간판을 내릴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당 지도부부터 소속 의원 및 당원들에 이르기까지 모이기만 하면 당을 없앨 궁리를 하느라 분주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열린우리당 간판으로는 어떤 선거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면 올해 대통령선거는 물론 곧바로 이어질 내년 4월 총선에서 참패할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들 말하고 있다. 한 정당이 선거를 앞두고 새로 당을 만들거나 당명을 바꾸는 것은 우리 정치사에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일을 문제 삼는다는 것 자체가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이번처럼 노골적으로 ‘우리가 살려니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나선 경우는 드물다. 과거에는 국민이 믿든 안 믿든 그럴 듯한 명분으로 포장하려고 안간힘이라도 썼다. 심지어 2003년 민주당을 깨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할 때는 ‘정치개혁’을 명분으로 삼았고, 어느 정도 공감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열린우리당에서 이야기하는 신당 창당에는 ‘왜’라는 설명이 들어 있질 않다. 일단 간판부터 내리고 난 뒤 그 이유를 찾겠다는 식이다. 열린우리당이 그토록 비난해온 과거의 정치보다 더 퇴행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이번 대선을 ‘구도(構圖)의 싸움’으로 몰아가려는 생각이 깔려 있다. 한 여당 실세는 “우선 구도부터 정비하는 게 시급하다”고 했다. 어차피 인물 경쟁력에선 한나라당에 크게 밀리고 있으니, 전통적으로 자신들을 지지해온 지역과 세대, 이념을 묶어 세(勢) 대결을 펼 수 있는 구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먼저 탈당하겠다는 측이나 당을 일부 손질하자는 사람들이나 이 점에선 크게 다르지 않다. 신당 창당과 그 뒤에 이어질 일련의 이합집산을 거쳐 구도가 갖춰지면 누가 현 여권(與圈)의 후보가 돼도 한 번 해볼 만하다고 했다. 그럴 듯한 이벤트(정치기획) 몇 번이면 승산도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런 발상에서는 여권이 벌인 정치 실험에 상처받은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그 실험이 남겨놓은 적폐(積弊)에 대한 고민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당 간판을 내리는 것조차 ‘열린우리당답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