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2일자 오피니언면 '특파원칼럼'란에 이 신문 선우정 도쿄특파원이 쓴 '개헌론에도 국격(國格)이 있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일본에서도 요즘 신문에 ‘개헌(改憲)’ 이야기가 종종 등장한다. 한국과 비교해 보면 개헌론 하나에서도 어쩌면 이렇게 노무현 정권의 경박함이 여지없이 드러나는지 신기할 정도다.

    한국엔 흔히 아베 신조 총리가 ‘개헌 아젠다’를 불쑥 던져 일본 사회가 설왕설래하는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이는 잘못이다. 개헌을 둘러싼 연표를 정리하면 단기적 움직임조차 일본 국회가 헌법조사회를 설치한 2000년까지 올라간다. 이후 2002년 집권 자민당이 신(新)헌법 기초위원회를 설치하면서 개헌 논의는 본격화됐다. 국회 조사회는 개헌 필요성을 검토하는 것이었지만 자민당 위원회는 개헌을 전제로 새 헌법을 쓰기 시작한 것이니 정권의 의도가 국민들 앞에 명확히 공개된 것이다.

    이 자민당 위원회가 신헌법 1차안을 발표한 것은 2005년 8월이다. 그리고 그해 11월 자민당은 창당 50주년에 맞춰 신헌법 초안을 발표했다. 위원회를 설치한 지 3년 만이다. 국회 헌법조사회가 개헌 필요성을 제시한 보고서를 제출한 것도 그해 4월. 국회의 경우 5년의 조사 기간이 필요했다. 그 시기 연립여당 공명당도, 야당 민주당도 독자적인 개헌 방향을 제시해 ‘개헌(改憲)이냐, 가헌(加憲)이냐, 창헌(創憲)이냐’라는 논란에 불을 지폈다.

    일본 신문도 자민당 초안이 나오기 2년 전부터 개헌을 핵심 이슈로 끌어들였다. 개헌에 대한 찬반을 묻는 여론조사도 2004년부터 정기적으로 실시됐다. 시간이 갈수록 개헌에 대한 찬성론이 늘어나 이제 찬성 비율이 80%에 육박한다. 사회 구성원들의 기나긴 논쟁이 개헌을 금기시한 국민들의 마음을 돌려놓는 교사 역할을 한 것이다. 나라의 근간을 바꾸려면 어느 정도의 숙고와 공감대가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또 하나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전후(戰後) 평화주의를 상징하는 헌법 9조를 바꾸는 것이 일본 개헌론의 전부라는 것이다. 물론 재무장을 금지하는 헌법 9조 개정이 핵심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환경권, 프라이버시권, 알 권리처럼 새롭게 부각된 ‘시대 정신’을 담아내는 작업도 똑같이 중시되고 있다. 개헌 찬성 여론이 강해지는 것도 이런 새로운 시대 정신을 헌법에 담는 작업에 국민들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사실 1955년 ‘보수합동’으로 성립한 자민당 자체가 당시(黨是) 1조에 헌법개정(자주헌법 제정)을 명시하고 탄생한 개헌 정당이다. 40년 싸움을 통해 호헌(護憲) 정당인 사회당을 격침시키고 10여 년간 국민을 설득한 뒤, 이제 겨우 ‘개헌’을 집권 공약으로 내세운 총리를 국민 앞에 등장시킨 것이다. 개헌 작업을 시작한 고이즈미 전 총리조차 재임 5년 동안 개헌을 역설하지 않고 환경 조성에만 힘을 기울인 것에서 헌법의 존엄성과 자민당의 집념을 함께 읽게 한다.

    물론 일본의 개헌은 과거 패전의 멍에에서 탈출한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따라서 국내외를 아우르는 고도의 여론 정지작업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통일을 생각하면 한국의 개헌 작업 역시 일본보다 가벼울 것이 없다. 지금 한국 대통령의 남은 임기는 통일 한국을 경영할 ‘100년 헌법’의 전문(前文)조차 쓸 수 없는 시간이다. 대통령이 나서서 “(임기가 끝날 때까지) 개헌을 두 번 할 수 있는 시간이 남아있다”고 들이댄다면, 그런 헌법을 가진 이 나라의 품격은 무엇인가. 대체 언제까지 국격(國格)을 손상시킬 작정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