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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7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양상훈 논설위원이 쓴 칼럼 '노 대통령의 시계추 운동'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2003년 5월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후 두 달여 만에 미국을 방문해 한 말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53년 전 (6·25 때) 미국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쯤 정치범 수용소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연설이 나온 그 방미(訪美)다.
노 대통령은 미 상공회의소 주최 오찬에서 “미국에 올 때 머리로 (미국에 대한) 호감을 가졌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으로 호감을 갖게 됐다”고 했다. 워싱턴 교민과의 간담회에선 “미국은 남북전쟁과 2차 대전 등에서 자유, 인권 등 보편적인 가치와 민주주의를 내걸고 승리했다. 미국은 대단히 부러운 나라이고 정말 좋은 나라”라면서, 교민들을 향해 “미국은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한 사람이 살고 있는 나라, 자유, 정의가 항상 승리해온 나라다. 이런 매우 자랑스러운 나라에서 자녀를 키우고 사는 것은 부럽고 자랑스럽고 희망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촛불시위 같은 일로 미국을 비난해서 교민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귀국해서 설득하겠다는 말도 덧붙여졌다.
노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가 귀국하자마자 좌파 지식인 리영희씨에게서 막말을 듣는다. 리씨는 방송 간담회에서 노 대통령에 대해 “무식하다”고 일격을 가했다. 그러면서 “노 대통령의 정신 자세는 상당히 위험하다. 미국 가서 그 양반이 보인 태도는 시골 사람이 자기 깐에는 ‘자기가 옳은 인식을 한다’고 하다가 주저앉은 꼴이다. 미국이 대접하고 등 두드려 주니 사람이 깜박 죽었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자신에게 싫은 소리 한 사람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리씨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리씨가 그 방송에서 말한 생각들을 다시 읽어 보면 현실과 동떨어지고, 정반대로 드러난 사실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리씨의 생각과 비슷한 내용들이 나중에 노 대통령이나 정권 실세들 입을 통해 나왔다.
노 대통령이 최근 민주평통 연설에서 “휴전선에서 미군 빠지면 다 죽는다고 국민들이 와들와들 떤다”고 한 말은, 당시 리씨가 “국민들의 머리가 완전히 병들었다. 국민 의식이 마치 미국 없으면 한국은 죽는다는 것”이라고 한 말과 같다. 김정일이 제정신이어서 전쟁을 안 할 것이고, 북핵이 방어용인 것처럼 말한 노 대통령 연설은 “최근 10~15년 사이엔 북한이 정치, 군사적으로 남한에 대한 위협이란 근거가 없다”고 한 리씨 말과 일맥상통한다.
당시 리씨는 “미국이 일본을 오른쪽, 남한을 왼쪽에 놓고 3각 편대를 만들어 남한과 일본이 실제적 (대북) 전쟁으로 가게 만든 후에 미국의 대북 전략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정부 내에서 한·미·일 남방(南方) 3각 위험론이 등장한 것이 그 얼마 후다. 리씨는 “(북한의) 핵무기는 수사(修辭)의 문제다. 미국은 될 수 있으면 앞질러서 북한이 뭔가 만들고 있다고 강변한다”고 했는데, 북한이 핵실험하기 직전까지 정권 내부의 분위기가 바로 그랬다.
리씨는 또 “한국 지식인 95%가 미국과의 관계 속에서 이득을 본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이는 그 후 청와대 홍보수석이 ‘친미파’를 비난하며 했던 말과 비슷하다. “북한 미사일은 한반도 평화를 원하지 않는 미국이 만들도록 유도한 것” “북핵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제네바 합의 위반 문제로 불러야 한다”는 등의 리씨 말은 정권 일각의 ‘미국 책임론’과 맞닿아 있다.
리씨는 그 방송 말미에 “노 대통령의 방미외교를 몰아붙이지 않는 게 좋겠다. 왜냐면 그 양반에겐 국제 정치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없으니 앞으로도 왔다갔다 할 것이다. (이번 방미 때처럼 하면) 안 된다는 여론이 형성되면 또 한쪽으로 올 것이다. 정견이 없는 사람은 시계추 운동을 하는데, 몰아붙이지 말고 바른 자리로 오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던 리씨는 2년여 만인 작년 한 인터뷰에서 “노 대통령이 대미 외교에서 주체성을 보이는 점에서 그만하면 잘하고 있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노 대통령의 시계추 운동이 리씨가 보기에 ‘바른 자리’로 온 모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