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중 전 대통령을 두고 한나라당이 딜레마에 빠졌다. 특히 지난 4일 김 전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만남 이후 한나라당의 고민은 점차 커지는 모습이다. DJ의 '햇볕정책'과 노무현의 '포용정책'을 분리대응하면서까지 DJ를 감쌌던 한나라당은 DJ-노무현 두 사람의 만남 이후 DJ에 대한 스탠스를 두고 갈피를 못잡는 분위기다.

    DJ 비판을 자제하던 당 지도부는 최근 DJ의 행보를 강도높여 비판하기 시작했다. 6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이재오 최고위원은 열린우리당의 정계개편 움직임을 "'DJ식 권력잡기'를 하려는 술수에 불과하다"고 단언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은 권력을 잡으려고 많은 정당을 깼다가 만들곤 했다"며 "지금 그것들이 어떻게 되었느냐. 정당이 이렇게 되면 안된다"고도 했다.

    8일 열린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선 박희태 국회부의장이 DJ를 겨냥해 "전직 대통령들은 다 조용하지 않느냐. 전직 대통령은 조용히 있어야 하고 유유자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DJ가 향후 진행될 정계개편에 개입한다면 그동안의 한나라당 '호남구애'가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 크다. DJ가 여전히 여권의 지지층을 재결합시킬 영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DJ-노무현 만남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우려하던 양자 회동의 시너지 효과도 바로 나타났다. 두 사람의 만남 이후 '통합신당'과 '리모델링'을 주장하며 충돌하던 열린당 내 친노-반노 세력간 갈등은 일단 수그러들었다. 이런 DJ의 파괴력을 눈으로 재확인한 한나라당의 고민은 점차 커질 수밖에 없다.

    일부 의원들이 최근 'DJ행보'에 비판을 쏟아냈지만 아직까지 많은 의원들은 '그래도 DJ 공격은 안된다'고 주장한다. 남경필 의원은 지난 3일 일부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DJ에 대한 인신공격은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얼마전 김용갑 의원의 '광주 해방구' 발언 역시 한나라당으로서는 큰 타격이라는 설명도 곁들였다.

    "이번에 지면 끝"이란 절박감에 사로잡힌 한나라당은 '호남표'에 대한 고민과 동시에 오버랩되는 호남에서의 'DJ 영향력'을 머리 속에서 쉽게 떨치지 못한다. 최근 DJ를 비판하면서도 호남의 주요현안을 들고 호남에서 정책토론회를 계획하고 있는 점에서도 이런 한나라당의 고민을 읽을 수 있다.

    8일 '당의 공정한 대선경선 분위기를 만들겠다'며 만든 '희망모임' 창립대회장에 참석한 전북 정읍 당원협의회의 이의관 운영위원장은 당의 이런 고민에 비판을 쏟아냈다. 한나라당 소속으로 호남에 터전을 잡고 있는 이 위원장은 이날 자신의 솔직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는 "호남은 여러가지 변수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DJ"라며 "DJ가 있는 한 호남은 힘들다"고 단정했다.

    그는 "호남에서 DJ의 영향력이 크고작고를 떠나 DJ는 이번 대선에서 마지막 술수와 자신의 능력을 총동원해 3기 좌파정권을 만들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 비서의 말처럼 DJ는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자신은 어머어마한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라고 두려워 해 어떤 일이든 다 할 것"이라고 경고한 뒤 "DJ가 지난 대선 당시 여권의 정치공작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노무현 대통령의 테크닉도 쉽게 봐선 안된다"며 "한나라당이 공정경선을 통해 하나로 똘똘뭉쳤다 해도 DJ와 노무현을 가볍게 봐서는 안된다"고 재차 강조했다. 이 위원장은 실현가능성이 쉽지는 않지만 DJ 다음으로 호남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고건 전 국무총리와의 연대모색을 해법으로 제안했다. 그는 "고 전 총리와 연대하고 그를 끌어안을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며 "그 사람들(노무현-DJ)은 15일이면 정권을 잡을 수 있다고 한다. 이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위원장의 발언이 끝나자마자 고조흥 의원도 "방금 이 위원장의 발언에 동의한다"며 당의 서진정책을 회의 테이블에 올렸다. 이후 비공개로 진행된 회의에서도 이 문제는 상당시간 논의됐다고 참석자는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