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이 조자룡의 헌 창처럼 내휘두르는 '벼랑끝 외교'는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역설이 성립되는 시점이다. 북한은 세계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을 속된 말로 '데리고 노는' 꼴이다. 미사일 발사는 '맛보기'고 핵실험은 그들 벼랑끝 외교의 결정판인 셈이다.

    김정일 정권의 눈에는 지금 미국과 중국만 보일 뿐, 나머지 국가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 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우습게 보는 상대는 바로 아낌없이 퍼주면서 일방적인 동포애를 발휘하고 있는 대한민국이다.

    논리적으로 생각할 때 북한의 벼랑끝 외교는 세계 외교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무모한 억지요 반란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미친 정권이라고 무시해 버리는 것도 순진한 발상이다. 국제적으로 완전 고립되어 돌파구가 없는 상황에 갇혀있는 북한으로서는 그들 나름의 생존방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핵실험 이후 북한은 더욱 국제사회에서 스스로 고립을 심화시켰지만 확실히 그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북한이 6자 회담에 복귀할 뜻을 비치자 미국의 압박전략이 마침내 주효한 때문이라고 보는 관측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표피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핵실험 후 중국까지 대북압력에 가세하는 상황으로 발전한 데다가 북한선박에 대한 미국과 일본의 해상검문이 죄어들자 북한은 6자회담에 응하는 시늉을 하면서 시간을 벌자는 저의로 봐야 한다.
     
    북한은 6자 회담에 나오는 데 필요한 명분을 찾기 위한 몇 가지 요구조건을 미측에 제시했다. 첫째 북한체제를 모욕한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의 '폭정의 거점' 발언(작년 1월 미 상원 인준청문회)을 철회하고 사과할 것, 둘째 6자 회담의 틀 안에서 북-미 양자회담의 보장을 담보할 것 등이다. 

    그 동안 강경일변도로 나오던 부시행정부로서도 채찍만으로 북한을 길들이는 데는 한계를 느꼈는지 근자에 와서는 북한을 회담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당근으로 회유하는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북한은 주권국가(sovereign state)이며 침공할 의사가 없다" "6자 회담에 나오면 그 틀안에서 북-미 양자대화도 가능하다는 등의 발언이 그것이다.

    북한은 벌써부터 기고만장하고 있다. 미국의 가장 가까운 안보파트너인 일본을 향해 "일본은 6자 회담에 나올 필요가 없다. 나중에 미국으로부터 회담결과나 얻어들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린 것이다. 이는 아소 다로 일본 외상이 "핵보유국의 자격으로 북한이 6자회담에 참석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고 비판한 데 대한 응수 였다. 이런 여러가지 징후를 종합해 볼 때 북한의 벼랑끝외교는 서서히 먹혀들어갈 조짐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핵실험 후 김정일 정권은 특히 대내적인 통치면에서 인민들을 결속시키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즉 세계적으로 여덟번째 핵보유국이 되었다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과시하는 프로파간다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지난 번 남측의 민주노동당 대표들이 방북했을 때에도 평양거리에는 "핵보유국의 자랑을 안고 선군(先軍)혁명 총진군에 박차를 가하자"고 쓰인 대형 현수막이 요소요소마다 내걸려 있었다는 것이다.

    북한은 부시 행정부가 안고있는 정치, 군사적 약점까지도 파악하고 있다. 대 이라크전의 무모한 강행으로 부시에 대한 미국민들의 지지도가 엄청 추락한 상황에서 대북제재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계산과 함께 때마침 11. 7 중간선거의 대세가 민주당편으로 기울고 있어서 민주당이 상·하 양원을 장악하는 경우에는 대외정책의 대폭 수정이 불가피할 것이며 민주당이 그 동안 미북 양자회담을 주장해 온 사실로 미루어 볼때 북한의 입지가 훨씬 넓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북한의 핵실험 이후에도 미국의 북한제재에 동조하는 데 주저하고 변함없이 대북 포용정책을 계속하고 있는 것도 김정일 정권에게는 힘을 실어주는 셈이다. 며칠전에도 노무현 대통령은 외국인 투자자들 앞에서 "북핵위협을 과장해서는 안된다"면서 "군사적 균형은 안 깨진다"고 장담한 것으로 보도됐다. 

    북한이 마침내 핵을 보유했는데 '군사적 균형은 깨지지 않는다'니 대체 무슨 소리인가. 우리에게도 상응하는 핵무기가 있는가. 우리 군이 재래식 무기뿐인 상황에서 북한군이 핵무장을 했다면 그 순간부터 이미 군사적 균형은 깨져버린 것이다. 국군통수권자까지 겸한 대통령의 안보관이 이런 수준이면 국민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노 대통령은 자신의 주장만 옳다는 판단의 틀 속에 안주하지 말고 핵으로 무장한 북한의 위협 아래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전체 국민들의 생존권수호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생각하고 지금부터라도 대북정책을 전면 수정하는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