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0일자 정치면에 이 신문 홍준호 선임기자가 쓴 '정치분석'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북한의 핵실험(9일) 직후 대선 주자들의 의견을 전하면서 한나라당의 박근혜, 이명박, 손학규 세 사람을 ‘국제공조’를 우선하는 주자군으로, 범여권의 고건, 김근태 두 사람을 ‘남북공조’를 중시하는 주자군으로 묶은 한 방송보도가 나왔다. 이 보도에 접한 고건 전총리 진영은 “왜곡”이라고 강한 이의를 제기했다. 고건 진영의 핵심 관계자는 “북한이 핵실험까지 한 상황에서 우리 나라가 어떻게 국제공조를 중시하지 않을 수 있는가.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 구상(PSI)에도 유엔결의안의 취지에 맞는 범위에서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남북대화의 끈까지 놓아선 안된다는 게 고 전총리의 입장”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고 전총리는 북핵실험 하루 전날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는 경우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사업을 포함한 대북정책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북핵실험 당일에도 “이제까지의 안이하고 온정적인 대북정책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여권이 구상하는 오픈프라이머리 형식의 대선후보 경선에 관심을 보여온 고 전총리는 범여권 예비후보 중 지지도가 가장 높은 주자이다. 그런데도 그의 목소리는 지금의 여당 안에선 이렇다할 대접을 받지 못한다. 오히려 열린우리당이 가는 길은 정반대이다. 김근태 의장은 유엔안보리의 대북제재 결의안이 나오기 이전부터 “정부가 유엔 안보리의 대응 방침에 따라 방침을 정하겠다는 것은 당사국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대북제재 반대, 금강산관광, 개성공단사업 계속 추진, PSI 참여 반대를 주장했다. 금강산 관광 사업체를 찾아가 ‘금강산 파이팅’을 외쳤고 20일엔 개성공단을 방문한다.

    고 전총리에게 더 큰 난관은 DJ(김대중전 대통령)일지 모른다. 북핵 실험 이후 미국 부시행정부의 공동 책임론을 거론하고 대북제재를 반대하면서 햇볕정책 지키기에 온힘을 쏟고 있는 DJ는 결과적으로 당밖에서 김 의장의 노선을 엄호해주는 가장 든든한 응원군이다. DJ의 공개적인 입장 표명 이후 흔들리던 여권 내부도 일단 김 의장 노선 쪽으로 가닥을 잡은 형국이다.

    범여권 후보를 노리는 고 전총리로선 이런 DJ와 여당내 분위기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이다. 참모들로부터 이 문제에 대한 발언 수위를 조절해야 한다는 건의가 있었고, 고 전총리도 남북현안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 표명의 수위를 놓고 고심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대북정책에 관한 DJ와의 노선 차이까지 숨길 생각은 없는 것 같다.

    그는 19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포용정책이 남북관계 개선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북핵 실험을 막지 못한 한계가 드러난 것 역시 엄연한 사실이다. 북한의 잘못된 행동에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한 것을 반성하고 시정할 것은 시정해야 한다. 북한의 잘못된 행동에는 책임 추궁과 응징이 뒤따른다는 것을 알게 하는 원칙있는 포용정책을 펴야 한다. 안보에 관한 한 실사구시적으로 가야 한다.” 

    북핵 실험 이후의 잇따른 대선후보 지지도 조사에서도 고 전총리는 여전히 범여권후보 중 선두로 나오고 있다. 특히 그에 대한 호남 유권자들의 쏠림 현상이 강화되는 흐름이다. 이에 비해 김근태 의장을 비롯, 햇볕정책 사수를 외치는 주자들의 지지도는 여전히 바닥이다.

    이런 모순된 현상은 왜 생기는 것일까. DJ의 주된 정치 기반은 재야와 호남이었다. 그 지지층은 지금 ‘고건’으로 상징되는 세력과 ‘김근태’로 상징되는 세력으로 갈려 있다. 과거 DJ는 상호 모순되는 이 두 세력을 모두 끌어안고 갈 수 있었으나 현재 드러난 범여권의 후보들 중에는 그런 흡인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가 없다. 따라서 여권내의 ‘고건’적 흐름과 ‘김근태’적 흐름은 범여권의 차기 대선후보를 결정해야 할 순간 정면 승부를 피할 수 없을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DJ의 강력한 엄호에도 불구하고 ‘김근태’로 상징되는 세력은 대선후보 경선 국면에서 아직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다. 재야파들은 고 전총리 지지도가 거품이라고 말해왔다. 무엇보다도 지금같은 대북노선을 고집할 경우 DJ지지층의 대거 이탈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본다.

    여당 내에는 다른 의견도 있다. 당직을 맡고 있는 수도권의 한 의원은 “내년 대선과 후년 총선에서 야당과 승부해보려면 ‘중도’로 이동해야지 ‘진보의 강화’로 가서는 필패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의원들이 적지 않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런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이 당에서 자칫 진보쪽 인사들의 눈밖에 났다가 정치적으로 망하는 것 아닌가하는 관성적인 우려를 하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이미 여당에선 김 의장의 개성공단 방문을 비판하는 의원이 속출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미국 힐 차관보에 앞서 현금을 주는 금강산관광사업만큼은 중단해야 한다고 국회 질의에서 주장한 의원도 있다. DJ노선의 계승자를 자임하는 민주당의 한화갑 대표마저 19일 “북한을 민족적 차원에서 다룰 상대가 아니라는 게 증명됐다. 북한을 제지하는 데 필요하면 동맹관계를 중시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고 전총리는 범 여권내 이런 또 다른 흐름에 기대를 걸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그런 흐름에만 기대어 범여권 경선 레이스의 선두를 계속 지켜나갈 수 있다고 판단할지, 설령 후보가 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DJ와 거리를 두는 지금의 스탠스를 끝까지 유지하며 정면 승부를 펼쳐 나갈지 흥미롭게 지켜볼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