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27일자 오피니언면 '노트북을 열며'란에 이 신문 이정민 정치부문 차장이 쓴 '여성이 방패막인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장상 전 이화여대 총장이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것은 2002년 7월이었다. 당시 김대중 정부는 대통령 아들과 측근비리로 휘청대고 있었다. 대통령과 집권당의 인기는 곤두박질쳤고 국정 장악력마저 약해진 집권세력에 여소야대라는 현실은 가혹했다. 무기력해진 청와대는 꽉 막힌 정국을 돌파할 묘책을 갈구했다.

    '장상 카드'는 이런 갈증을 일거에 해소해줄 비책으로 보였다. '헌정 사상 첫 여성 총리'라는 상징성에 여성계는 환호했다. 학자 출신의 여성 총리라는 이미지는 참신하게 비쳤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이 될 뻔한 장상 총리 임명은 국회 청문회 과정에서 부동산 투기 논란, 아들의 국적 의혹 등 의외의 복병에 걸려 좌초된다.

    그로부터 4년, 노무현 정부는 '한명숙 총리' 카드를 관철했다. ▶지방선거를 앞둔 미묘한 시기이며 ▶열린우리당 당적을 갖고 있다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한 총리는 국회의 관문을 무난히 통과했다. 부드러운 이미지와 청문회 과정에서 철저히 정치 색깔을 뺀 '낮은 자세'로 임했던 것 등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마침내 '헌정 사상 첫 여성 총리'는 실현됐다. 많은 사람이 갈채를 보냈다.

    그 후 넉 달이 흐른 지금, 노무현 정부는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카드를 뽑아들고 있다. 청와대는 1988년 헌재 출범 이후 '첫 여성 헌재소장'으로 기록될 것임을 강조하는 중이다. 다만 임명 과정과 절차에서의 위헌 논란으로 여야가 격돌하고 있어 전 후보자에 대한 인준 여부는 아직 불투명하다.

    전 후보자에 대한 임명동의안이 가결되면 여성사엔 또 하나의 신기록이 보태진다. 대통령.국무총리.국회의장.대법원장과 더불어 요인의 한 명으로 꼽히는 헌재소장 자리에 여성이 오르면 사회에 미칠 긍정적 파장도 클 것이다. '딸'들의 미래가 더 밝아질 것은 물론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됐다는 얘기도 된다.

    하지만 박수만 치기엔 왠지 뒷맛이 개운치 않다. 장상-한명숙-전효숙 지명으로 이어지는 배경에 깔려 있는 어떤 '의도'가 감지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임명권자의 힘이 약해지는 임기 말에 중용됐다. 그것도 정치적으로 수세에 처하고 권력의 힘이 빠지는 국면에서다. 권력이 잘나갈 때, 힘 있을 때는 거들떠보지 않다가 위기와 난관에 처하자 '첫 번째 여성…' 운운하면서 앞장세웠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정부의 실정을 호도하고 정치적 위기를 돌파해 국면 반전을 노린 꼼수"라거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구원투수"라는 비판이 나온다. 물론 이들 개개인의 능력.자질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러니 당사자들로선 오히려 억울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전 후보자 임명을 강행하려는 청와대와 자진사퇴를 종용하고 있는 한나라당의 격돌을 보면서 한 여성의원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에서 아버지가 사업하다 망하면 어머니를 시켜 빚 얻으러 다니도록 했던 것처럼 정치적 위기에 처할 때 여성을 방패막이로 내세우거나 (잘못을) 사과하게 해 위기를 넘기려는 것도 가부장적 문화의 유산"이라며 씁쓰레했다.

    능력 있는 여성들이 고위직에 오르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세계적 흐름이 됐다. 앞으로 이런 추세는 더 확대될 전망이다. 하지만 도도한 시대적 흐름에 슬쩍 올라타 국면 돌파용으로 여성을 기용하려는 풍토는 바람직하지 않다. 이는 여성에 대한 또 다른 편견을 낳을 뿐이다.

    여성 리더십의 강점은 반부패.도덕성.소프트 파워에 있다. 그런 만큼 여성 지도자들도 당당히 평가받고 상응한 대접을 받는 시대가 열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