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2일자 오피니언면 '기획시론-자주(自主)를 생각한다' 시리즈에서 철학부문을 맡은 윤평중 한신대 교수가 쓴 글입니다.

    자주(自主)의 유령이 온 사회를 뒤덮고 있다. 통일, 전작권 문제, 한미FTA 등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문제들에서 명분론적 자주담론이 득세하고 있다. 고난의 역사를 헤쳐 나온 한국인은 자주에 목말라있다. 세계적으로도 전례가 드문, 한 세대만의 민주화와 산업화의 동반성취는 이런 집합적 자존감의 근원을 이룬다.

    ‘남의 보호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 일을 스스로 처리함’. 이것이 자주의 사전적 정의다. 이런 정의를 빌리지 않더라도 자주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우리는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개인 차원에서 자주는 ‘스스로 서는 것’으로서 자발성과 능동성, 그리고 책임을 동반한다. 동아시아 전통문화의 맥락에서 친숙한 예는 공자가 설파한 ‘서른에 선다(三十而立)’일 것이다.

    그런데 자주라는 말은 개인보다는 주로 집단 차원에서 구사된다. 국가나 민족 같은 정치공동체나 사회경제적 조직과 연관된 집합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용어로 사용되는 것이다. 개인의 자주성을 얘기할 때는 자유라는 용어가 더 친숙하게 쓰여진다. 집단의 자주나 개인의 자유 여부를 판정하는 기준은 자율성과 능동성이다. 자유롭게 판단하고 자율적으로 실천하며,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는 존재만이 자주적일 수 있는 것이다.

    자주의 이념은 이렇듯 보편적 호소력을 지닌다. 역사에 어떤 방향성을 설정할 수 있다면, 그 대표적 범례는 인간 자율성의 진전일 것이다.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근대인의 성립은 자율적 인간과 민주시민으로 구체화된다. 이와 정치적으로 동행하는 현상이 근대민족국가의 출현이다. 통일민족국가 수립의 좌초라는 현대사의 그늘 때문에 고통 받는 우리가 자주담론에 매혹될 수밖에 없는 이념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식민지 시대의 조선 사람이 자유를 꿈꿀 수 없는 것처럼 정치공동체의 자주와 개인의 자유는 상호보완적이다. 그러나 공동체의 자주는 근원적으로 개인의 자유로부터 비롯되며, 평범한 시민들이 누리는 자율성에 의해 정당화된다. 민주공화국을 규정하는 근본 정치원리가 주권재민인 것은 이 때문이다. 개별적 시민의 자유를 외면하는 자주논리는 자기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에 유행하는 자주담론은 이런 치명적 문제에 노출되어있다. 명분과 감성에 치우친 자주의 깃발이 시민들의 이성적 판단을 미혹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개별 시민들의 자유와 독립성이 자주의 이름으로 훼손되고 있다. 정치적 선전선동 수단으로 동원되는 자주담론이 민주공화국의 질서를 오히려 위협하는 현상도 발견된다.

    자주의 이념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는 오늘의 북한이 웅변한다. 북한판 자주이념의 결정체인 주체사상은 자주의 미명 아래 개별적 인민의 자유를 박탈한다.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자주성 테제는 수령이 인민에게 ‘정치적 생명’을 부여한다는 해괴한 결론으로 인도된다. 즉 ‘수령에게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자(者)만이 사람’이라는 영도이론으로 귀결됨으로써 주권재민을 원천적으로 부정한다.

    국가와 민족의 자주를 내세우면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질식시키는 것은 자주성에 대한 배반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북한이 직면한 온갖 문제의 사상적 근원이다. 인민들의 자발성과 능동성이 완벽히 봉쇄된 사회가 조만간 폐허로 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북한현대사의 암울한 행로가 입증한다. 2000만 인민의 자유를 사멸시킨 대가로 오직 한 사람의 수령만이 ‘자주성’을 향유하는 ‘주체조국’이 퍼뜨린 것과 비슷한 사이비 자주담론에 현혹되는 사람이 적지 않은 한국은 과연 ‘지구상에서 가장 기형적인 사회’다.

    자주는 원래 좋은 것이지만 도식화된 자주담론은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한다. 선전선동의 도구로 타락한 자주의 구호처럼 위태로운 것도 드물다. 그 결과 우리는 진정한 자주성이 보통사람들의 자유와 행복한 삶으로부터 온다는 평명(平明)한 사실을 잊게 된다. 윤평중 · 한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