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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1일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박두식 정당팀장이 쓴 '베트남의 용미(用美)'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작년 6월 21일, 미국 언론에는 낯선 외국 정상의 글이 실렸다. 당시 베트남 총리였던 판 반 카이의 기고문이다. 카이 총리는 이 글에서 “베트남은 미국이 비할 데 없는 경제적·과학적·기술적 역량을 지난 강대국이며 핵심적인 동반자라고 본다”, “미국과 더불어 테러와의 투쟁을 함께할 것을 약속한다”고 밝혔다. 이 글이 실린 날, 카이 총리는 백악관에서 부시 대통령을 만나, 안보·군사·경제 분야의 협력을 약속받았다.
카이 총리의 미국 방문은 베트남으로선 새로운 전환점이었다. 미국을 외교의 지렛대로 삼는, 베트남식 용미(用美) 노선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 노선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올해만 해도, 해스터트 하원의장, 럼즈펠드 국방장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등 미국 정·관·재계의 주요 인물들이 베트남을 찾았다. 부시 대통령도 오는 11월 베트남에서 열리는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할 예정이다. 이들은 제각각 크고 작은 선물보따리를 들고 갔다. 베트남이 숙원처럼 추진해 온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이 올해 말쯤 이뤄지게 된 것이나, 베트남 군인들이 미국 군사고문단으로부터 현대식 군사교육을 받게 되는 등 군사협력이 가능해진 것도 이런 노력의 결과다.
망외(望外)의 소득도 있다. 미국과 베트남이 가까워지면 예민해지는 나라가 중국이다. 베트남은 1960년대 내내 미국과 전쟁을 벌였고, 또 1970년대 후반에는 중국과 싸웠다. 카이 총리의 방미로부터 5개월 뒤, 후진타오 중국 주석이 베트남을 방문했다. 중국은 요즘 베트남과의 숙원을 푸느라 분주하다. 미국과 베트남이 손잡고 중국을 포위하는 지정학적 상황을 방관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지금 미국과 중국은 경쟁적으로 베트남 지원 계획을 내놓고 있고, 민간 기업 진출도 늘고 있다고 한다.
베트남은 가난한 나라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작년 말 현재 베트남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620달러. 세계은행이 집계하는 208개국 중 166위였다. 그러나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하고, 천연자원도 풍부한 데다, 베트남 국민의 자질도 뛰어나다. 바로 이런 매력 때문에 베트남은 줄곧 열강의 각축장이 됐던 것이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발생한 베트남인 희생자 수는 줄잡아 120만명을 넘는다. 지금 베트남 인구는 8300여만명이다. 어지간한 베트남 사람이라면, 주변에 미국과의 전쟁 피해자 한두 명 이상이 있을 법한 상황이다. 이런 조건에선 언제든 ‘반미(反美) 선동’으로 정치적 난관을 돌파할 수 있다. 강국과의 전쟁에 익숙한 베트남이다. 또 1985년부터 도이머이(Doi Moi)라는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했지만, 지난 20년의 성과가 만족스럽다고 하긴 어렵다. 그 책임을 미국이나 중국 같은 주변 강국에 돌리거나, 이들을 적대시하는 정책으로 정치적 안정을 꾀하려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은 반대의 길을 택했다. 미국을 외교적 디딤돌로 삼아, 스스로의 전략적 가치를 높여갔다. 거꾸로 우리는 베트남과 반대되는 길로 접어들고 있다. 실익(實益)보다는 자존심을 중시하는 태도가 외교의 기조(基調)가 된 것이다. 전시 작전통제권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고려 사항이 ‘자존심’이고, 미국·일본·중국 등 주변 강국을 대하는 태도도 모두 여기서 출발하고 있다. 외교도 ‘맞짱’을 뜨는 식이 된 것이다. 베트남은 지난 세기에만 프랑스·미국·중국 등과 싸워 승리했다. 그런 베트남도 외교에서 자존심을 앞세우지 않는 것이 요즘의 국제 흐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