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4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두우 논설위원이 쓴 '날치기해도 박수받는 법'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한국인은 끝장을 보는 특성이 있다고 한다.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에서 가지고 갔던 돈을 몽땅 털려야 일어서는 동양인은 대체로 한국 사람이다. 조금 잃거나 땄을 때 '오늘 잘 놀았다'며 돌아서는 광경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최근 '바다이야기' 파문도 끝장을 보고야 마는 한국인의 심리와 맞닿아 있다.

    한국 사회가 겪지 않아도 될 위기를 자주 맞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설혹 위기의 징후를 미리 읽은 이가 경고음을 발해도 '설마'하는 심정으로 끝을 보고서야 후회한다. 나라가 거덜날 뻔한 외환위기는 그렇게 찾아왔다. 외환위기 정도는 유가 아닌 게 국민연금 문제다. 그런데도 끝장 날 때까지 아무도 손대려 하지 않는다.

    하루 8만원씩 빚진다면 평범한 봉급생활자는 조만간 파산신청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의 대표 기업이라는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가 하루 8억원씩 적자를 본다면 어떻게 될까. 잘해야 몇 년 버티는 게 고작이리라. 그런데 하루 800억원, 연간 30조원의 부채를 쌓아 가고 있는 게 국민연금이다. 2010년에는 327조원, 2020년엔 864조원의 잠재부채가 누적된다. 기업이라면 벌써 구조조정을 한다. 원가 절감 대책을 세운다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모르쇠다. 야당이야 반대와 견제를 위해 존재하는 정당이라서 그렇다 치자. 여당은 도대체 무엇하고 있는가.

    8월 20일 노무현 대통령과 여당 지도부의 오찬 회동 때의 일이다. 노 대통령이 국민연금 개혁안을 정기국회에서 처리해 줄 것을 당부했다. 오찬장에는 갑자기 적막이 흘렀고, 결국 여당 지도부는 못 들은 척 넘어갔다고 한다. 8월 31일 열린 여당의 워크숍 자료집에서도 정기국회에서 처리해야 할 각종 법안에 대한 설명은 있었지만 국민연금 개혁안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여당 지도부는 국민연금의 심각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김근태 당의장은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 "국민연금은 이대로 가면 20년 뒤에는 소득의 30%를 보험료로 내야 하는데 이는 우리 아들딸에게 감당 못할 부담을 전가하는 것이며 부도덕한 일"이라고 했다. 강봉균 정책위 의장과 제종길 제5정책조정위원장은 "하기는 해야 하는데 당내 논의가 충분치 않아서…"라며 말을 흐렸다.

    김한길 원내대표 측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공식 보고받은 바 없다"고 했다. 그래서 복지부에 "여당 지도부에 설명했느냐"고 물어봤다. 유시민 복지부 장관이 면담을 신청했지만 아직 만나지 못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에 대해 김한길 대표 측은 "바빠서 아직 일정을 잡지 못했다"고 변명했다. 2주일이 지나도록 말이다. 변재진 차관의 면담 요청에 김 의장 측은 "그 내용이라면 다 알고 있다"며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문제가 뭔지 뻔히 알면서 처리하지 않겠다고 말하기는 낯 뜨거우니 차라리 만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인기 없는 정책을 대선을 앞두고 굳이 밀어붙일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여론조사의 함정에 빠져 그렇다. "지금보다 보험료는 더 내고 연금은 덜 지급받아도 좋으냐"고 물으면 대부분 싫다고 답변하게 돼있다. 질문을 바꿔 "이렇게 가다가 연금 재정이 고갈돼 한 푼도 지급받지 못해도 괜찮겠느냐"고 국민에게 물어보라. "무슨 헛소리냐"며 펄쩍 뛸 것이다.

    여당은 여당다워야 한다. 국정 운영의 책임을 다한 뒤 그 결과를 놓고 심판을 받아야 한다. 힘 다 빠진 임기 말에 표를 잃을 게 뻔한 국민연금 개혁이나 하자는 노 대통령이 보기 싫다고? 얄미운 유시민 장관을 왜 도와주냐고? 그런 소아병은 하루빨리 벗어나라. 그런 자잘한 정치적 계산으로는 큰 싸움에서 결코 이기지 못한다. 얍삽한 눈치보기보다는 열과 성을 다해 국정에 임하는 모습에 국민은 감동한다. 여당의 책임을 방기하고서 다시 집권하겠다는 건 파렴치한 일이다. 날치기해서라도 통과시킬 법안은 사학법이 아니라 국민연금법안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