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7일자 '중앙시평'란에 김종석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가 쓴 '개혁장사의 종말'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친정부 인터넷 매체를 운영하던 어느 진보 성향의 인사가 "앞으로 개혁만 팔아먹어도 10년은 잘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한 것이 불과 2년 전이다. 당시 분위기로 봐서는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지난 지방선거와 재.보궐선거 결과를 말하지 않더라도, 지금 민심 같아서는 다음 선거에서 진보.개혁 운운하는 것은 정치적 자살행위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를 아는 일부 정치인이 벌써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기업인들을 찾아다니고 경제 활성화를 외치고 있다.

    개혁과 진보라는 좋은 단어가 지금과 같은 처지에 처한 것은 그 진보 성향 인사 말대로 '개혁을 팔아서' 집권한 현 정부가 집권 뒤 보인 급진성과 독선, 무능과 혼란 때문이다. 사실 학술적으로 현 정부의 정책이 모두 개혁적이고 진보 노선인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국민 눈에는 개혁이나 진보나 좌파나 운동권이나 모두 현 정권과 같은 집단이다.

    진보적 인사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면 대체로 이들이 순수하고 정의감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은 저항과 비판에는 능하지만 관념적 이상론과 명분론에 빠져 세상물정과 정책에는 약하다. 가슴은 뜨겁지만 머리가 차갑지 못하다. 골고루 잘살자고 하지만, 그 사람들 하자는 대로 해보니 오히려 빈부격차는 더 커졌다. 그럼에도 진보적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존재가 우리 사회의 다양성과 균형 잡힌 여론에 기여하는 것은 분명하다. 또 이들의 목소리는 한.미 자유무역협상(FTA)과 같은 국제협상에서 우리 정부 입장을 강화해 주는 효과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이 이런 사회적 순기능을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들이 책임지지 않는 소수로서 우리 사회의 소금과 경종의 역할을 할 때까지다. 비전문적 현실인식과 급진적 사고방식을 가진 운동권 사람들이 국정의 운전석에 앉게 되면 완전히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지난 3년 반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또 한 가지 진보 좌파가 국민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이유는 그들이 북한 정권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편향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견해가 다르고 이념이 달라도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이 전제되어 있다면 한 국민으로서 함께 지내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 경우 견해 차이는 우리나라를 잘되게 만드는 방법의 차이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좌파 인사 중에는 북한 주민보다 더 친북적인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대한민국을 부정하면서 대한민국보다는 북한 정권의 안전과 이익을 더 중시한다. 민족과 통일, 한반도 평화 때문이라고 한다.

    누가 한반도 평화를 바라지 않을까. 그러나 평화는 지키는 것이지 구걸하는 것이 아니다. 평화를 구걸하며 주는 돈은 인질범에게 주는 뇌물일 뿐이다. 북한 정권은 지금도 무력이든 내부 혼란이든 온갖 수단을 써서 대한민국을 무너뜨리려 하는데, 우리부터 먼저 제도적으로 군사적으로 무장해제 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국민은 지금 진보 운운하는 사람들의 애국심을 의심하고 있다. 그들 때문에 우리나라의 안보와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개혁은 잘못된 것을 고치자는 것이고 진보는 앞으로 나가자는 것인데, 개혁하자면서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고 진보하자면서 1980년대 운동권 논리에 빠져 있으니 국민이 개혁과 진보 소리만 들어도 짜증을 내는 것이다. 진정한 개혁과 진보에 누가 반대할까. 문제는 개혁 장사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개혁과 진보를 정권 장사를 위한 포장으로 사용하니까 국민이 그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잠시 속일 수는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항상 속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항상 속일 수는 없다." 링컨 대통령의 말이다. 마치 21세기 한국의 개혁 장사꾼들에게 하는 말 같다.